"저기가 향랑이 투신 자살한 오태소지요." 구미 오태동의 한 주민이 어른들로부터 들어온 향랑의 마지막 행적을 이야기하고 있다. 박창희 기자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경북 구미시 오태동 낙동강가에서 한 여성의 투신 자살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이름은 향랑(香娘), 나이는 19세. 평범한 서민(양인) 집안의 딸이었던 향랑은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 슬하에서 자라 17세에 같은 마을에 사는 14세의 칠봉에게 출가했다. 남편 칠봉은 성질이 괴팍했고 외도를 하면서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향랑은 3년만에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왜 왔느냐, 죽어도 그 집에서 죽어라." 친정 부모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숙부에게 찾아가 의탁했지만 숙부는 조용히 개가를 종용했다. 향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시댁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남편의 횡포는 더 심했고 이번엔 시아버지까지 개가를 권유했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향랑은 자신의 심경을 초녀(樵女·나무하는 여자 아이)에게 간절하게 전하고 '산유화가(山有花歌)'를 구슬프게 부른 뒤 낙동강 지류인 오태소에 몸을 던졌다.
● 열녀비
이 사건을 보고받은 선산부사 조귀상은 향랑이 절의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며 조정에 그를 열녀로 추천한다. 품신 기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릇 목숨을 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장부도 어려운 일인데 아낙네, 하물며 시골 계집에 있어서랴….' 2년 뒤 숙종은 향랑을 '정녀(貞女)'라 부르고 그 무덤 옆에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향랑은 시골의 무식한 여자로서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를 알아 죽음으로써 스스로를 지켰고 또 죽음을 명백히 하였으니, 비록 삼강행실에 수록된 열녀라도 이보다 낫지 않다.' 향랑은 이렇게 정려(旌閭)되어 이름이 남았다.
선산부사는 '선산 읍지-인물조'에 향랑전을 실었고 18, 19세기의 문사들은 향랑의 이야기를 전(傳), 한시, 소설, 잡록 등의 형식으로 남겼다. 그후 잊혀져 있던 향랑 이야기는 1990년 초 구미문화원에 의해 되살아났다. 구미문화원은 구미시 형곡동 산21번지에 있는 향랑의 무덤을 복원하고, 비석과 사당을 세워 그가 자결했다는 음력 9월 6일을 맞춰 묘제(墓祭)를 지내고 있다.
야은 길재 선생의 절의를 기려 세운 지주중류비. 향랑이 자살한 구미 오태동 오태소 옆에 있다.
● 열녀 뒤집어 읽기
향랑의 이야기는 간간이 대학에서 당대 사회상을 조명하는 석·박사 학위 논문의 소재가 되었고 단행본으로도 묶였다. 이 중 압권은 '향랑, 산유화로 지다'(정창권 지음, 풀빛)라는 역사 스릴러물이다. 국문학자인 저자는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오가며 다양한 자료를 동원해 17세기말 조선시대 가정사를 복원한다. 일종의 미시사(微視史)다. 향랑의 자살사건을 탐정처럼 추적해 저자가 내린 결론은 '향랑은 열녀가 아니라, 18세기께 가부장제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였다'는 것. 향랑의 죽음은 그녀를 열녀의 길로 내몬 당대 가족제도와 사회 체제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타살이라는 주장이다. 저자의 정치적 입장은 분명하다. 향랑의 존재는, 먼 고대로부터 조선 중기까지 이어지던 선조 여성들의 정상적인 삶과 단절, 여권(女權)이 억압되던 시기에 나타난 불행한 상징일 뿐이다. 가부장제의 허상과 폐해를 이처럼 극적으로 파헤친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
● 불경이부의 뜻
그럼, 향랑의 열녀비를 파내야 하는가? 이 심각한 의문에 대해 구미문화원 김교홍(73) 전 원장은 "하나만 보고 둘을 못본 해석"이라며 되레 일침을 가한다. 김 전 원장은 1992년 향랑묘를 복원할 때 묘갈명을 쓴 사람이다. 그는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도 행하기 어려운 절의를 행했으니 가상한 일이지"라면서 "그 당시로선 그보다 아름다운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 전 원장은 향랑 발굴 경위도 설명했다. 1950년대 말 구미시 형곡동 금오산 기슭에서 소류지 공사가 있었다. 한 주민이 계곡에 파묻힌 비석을 발견했다. 해머로 깨뜨려 비석을 끌어올려 글자를 확인하니 '烈女香娘之墓'(열녀향랑지묘)라 적혀 있었다. 여력이 안돼 덮어 두었던 것을 김 전 원장이 문화원을 맡으면서 재발굴했다.
"불사이군(不事二君), 불경이부(不更二夫)는 당시의 생활철학이자 시대적 가치였어요. 시대상황을 도외시하고 보면, 우리가 절의의 상징으로 떠받드는 사육신이나 생육신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향랑의 이야기는 오늘날 절의의 가치 관념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어요." 김 전 원장은 세상이 달라져도 충·효, 예절교육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향랑을 통한 '열녀 뒤집어읽기'는 관점에 따라 옳은 접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사건 추리로 열녀의 허상을 밝히는 것이 온당한지도 논란이 될 수 있다. 비판받아야 할 것은 열녀가 아니라 열녀 이데올로기가 아닐지…. 향랑 이야기는 21세기 한국사회의 가족제와 절의 관념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낙동강 지류인 오태소에 새로 놓이는 공단교 조감도. 구미에선 처음 도입되는 닐센 아치교량이다. 빨간색 트러스가 절의를 연상시킨다.
● 지주중류비
어쨌거나 향랑 이야기는 슬프다. 꽃다운 10대 여성이 타의에 의해 죽었고, 죽음으로 인간 해방을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향랑이 목숨을 던졌다는 구미시 오태동의 오태소(吳泰沼)는 도시 변두리의 허다한 샛강이었다. 낙동강 남구미대교에서 300여 m떨어져 있으며, 70년대 구미공단이 들어서면서 원형이 크게 변했다.
구미 오태동에서 45년간 살았다는 장운익(70) 씨는 "이곳에 공단이 서기 전엔 낙동강가에 '신만주'라 불린 너른 농토가 있었다"면서 "향랑 이야기는 어른들로부터 가끔씩 들었으며 그가 죽은 오태소는 낙동강의 지류로 깊이가 자그마치 30m가 넘는다"고 말했다.
향랑이 죽은 자리가 야은 길재(吉再) 선생의 절의를 기려 새겨놓은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경북유형문화재 제167호) 옆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지주중류비는 1587년 인동(구미)현감 유운룡이 세운 비석. '지주(砥柱)'는 중국 황하 중류에 있는 산으로, 황하가 범람해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충절을 상징한다. 비문의 큰 글씨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이 썼다고 하며, 원래 오태소 옆에 있었으나 지금은 인근 언덕빼기에 옮겨져 있다.
길재와 향랑. 불사이군과 불경이부를 외친 두 인물의 유적이 한 곳에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 향랑교의 꿈
이런 곳엔 으레 나루 하나가 있다. 구미시의 향토사학자 김광수(50·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씨에게 넘겨 짚어 물어봤더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태소 샛강 아래에 낙동강 낙계나루가 있었죠. 낙동강의 물굽이가 닿는 곳인데 옛 구미 낙계동과 칠곡 석적(중리)을 잇던 나루였지요. 1970년대 초반까지 배가 있었는데 낙동강 호안공사로 사라졌어요."
구미엔 알려지지 않은 나루가 많았다. 아래로부터 꼽아보면 낙계-동락-비산-계동-강정-강창-월파진-송당-신풍-원흥-견탄나루까지 모두 11개다. 10여 년 전 이들 나루를 일일이 실측하며 조사했다는 김 씨는 "1974년 말 구미대교가 놓인 뒤로 나루터가 하나 둘씩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고 전했다.
우연의 일치인가 싶게, 향랑이 죽었다는 오태동 샛강에 새 다리 하나가 놓이고 있다. 남구미IC 진입로 확장공사로 새로 놓이는 오태동의 '공단교'다. 길이 69m, 폭 35m(4차로)의 '닐센 아치교'인데, 교각 없이 세모꼴의 대형 아치가 케이블로 상판을 들어올리는 구조다.
조감도를 보니 향랑이 생각났다. 빨간색 아치가 절의를 연상시킨다. 강철 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교각이 아니라 약해 보이는 케이블이란 것도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 다리는 2008년에 완공될 예정이다.
다리 이름을 바꿀 수 없을까. 무미건조하게 공단교라고 할게 아니라 '향랑교(香娘橋)'로 말이다. 정감도 있으려니와, 이를 통해 산업사회의 무한질주를 되돌아볼 수 있을것이다. '향랑교'가 되면 그 옆에 꼭 세워야할 노래비가 있다. '산유화가'비다. 한번 읊조려 볼거나, 향랑이 죽을 때 불렀다는 그 노래를.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天何高遠)/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가(地何曠貌)/천지가 비록 크다 하나(天地雖大)/이 한 몸 의탁할 곳이 없구나(―身靡托)/차라리 이 강물에 빠져(寧投此淵)/물고기 배에 장사 지내리(葬於魚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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