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구포와 강서 대저를 잇는 구포다리(구포교). 많은 추억과 애환을 남겼으나 두 차례 붕괴를 겪고 철거될 운명을 맞고 있다. 구포다리 왼쪽은 부산지하철 3호선 교량이다. 박창희 기자
물의 공격은 무서웠다. 70여년을 굳게 앙버티던 무쇠 다릿발이 순식간에 뽑혀나갔다. 우지끈~ 19번 교각이 붕괴되자 길이 15m짜리 상판 4개가 연달아 떨어졌다. 노도처럼 밀려든 강물은 상판과 교각의 철근, 콘크리트를 곤죽으로 만들어 닥치는대로 집어삼켰다.(2003년 9월 14일)
2년 뒤 다시 홍수가 닥쳤다. 이번에는 21번 교각이 엿가락처럼 휘어져 부서졌고 상판 하나가 속절없이 또 날아갔다.(2005년 9월 17일)
수모였다. 그렇게 견고하다던 일제의 근대 기술이 아닌가. 통짜 교각받침에 기둥 3개를 1조로 엮어 교각 56개를 촘촘히 세운 게르버 판형교(鈑桁橋)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동강난 구포다리(구포교). 부산 경남을 처음 이었던 다리. 눈물과 추억, 소통의 근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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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 직후의 구포다리(1935년도). 사진 낙동향토문화원 제공.
철거도 힘들어
철거는 기정 사실로 돼 있다. 2003년 처음 무너졌을 때만 해도 다시 연결해 인도교라도 활용하자는 여론이 높았다. 구포초등학교 총동창회가 앞장 섰고 지역주민들이 동조했다. 싫든 좋든 근대의 기념물이고, 추억의 산실이 되어 있으니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2차 붕괴가 있자 이런 목소리는 급속히 잦아들었다. 계속 무너지는 다리를 붙잡고 끝까지 지키자고 요구하는 것은 허망한 일이었다. 강물은 매정했다. 허술함이나 빈틈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부산시는 이 때다 싶었던지, 다대항 배후도로 통과를 구실로 구포 쪽의 다리목과 교각 5개를 철거했다. 이로써 구포다리는 확실한 반쪽이 되었다. 지난 연말 철거 용역을 끝낸 부산시는 철거 비용(85억 원) 확보에 고심하고 있다. 부산시는 철거 후 지하철 구포역사에 간단한 사료전시관을 만들 계획이다.
길이 1060m의 구포다리는 두 차례의 홍수로 88m가 붕괴되었고, 다대항 배후도로 통과를 구실로 200m가 뜯겼다. 남은 것은 수중부 211m, 강서 대저쪽 고수부지 구간 561m. 무너지고 동강난 모습은 안쓰럽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하다. 홍수에 유린당하고 인간에 버림받은 구포다리는 냉큼 죽어지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구포다리를 배경으로 담은 영화 '가면' 촬영 모습.
● 내 딸 사이소
그럼에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낙동향토문화원 백이성(61) 원장이다. "구포다리는 역경을 건너온 근·현대사를 증언하는 상징물입니다. 매년 정월대보름이면 다리밟기를 하려는 김해와 부산 시민들로 꽉 찰 만큼 지역민들이 삶과 문화를 나누던 곳이기도 하고요. 일부라도 남겨서 관광·교육자료로 활용해야 합니다." 요즘도 그는 구포다리를 살릴 방법을 찾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구포다리에는 지역민들의 많은 추억과 애환이 깃들어 있다. 다리 놓일 때의 일화 하나. 당시 경남도지사였던 일본인 와타나베는 공사비(당시 돈으로 70만 원) 일부를 인근 군·면에 분담시키기로 하고 장익원 구포면장을 불렀다. 김해는 물론 멀리 양산 주민들은 건설비를 갹출한 뒤였다.
"공사비를 좀 내야 하지 않겠소?"(와타나베)
"아니, 우리는 다리 때문에 손해를 보게 되는데 분담이라니요. 다리가 놓이면 구포나루 상권이 무너져요. 우린 못 내겠소."(장익원)
(화가 나서)"성의라도 보여야 하지 않소?"
(태연하게)"좋소, 그럼 1000원 정도는 내겠소."
(더욱 화를 내며)"그런 돈은 안받겠소."
(고개를 끄떡이며)"아, 그럼 면제해주는 걸로 알고 가겠소."
장 면장의 배짱으로 구포는 부담금을 한푼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2004년 간행된 구포초등학교 제24회 동창회 자료집에 소개된 내용이다. 이 자료집엔 '낙동장교가설기념비' 멸실 경위도 나와 있다. 일본 연호와 다리 건설에 참여한 일본인 관리 이름이 적힌 이 기념비는 원래 대저쪽에 있었다. 해방 직후 보기 싫다며 누군가가 시멘트로 비문을 지웠고, 1982년 일본 교과서 파동 때 성난 지역청년들이 아예 부숴버렸다는 것이다.
구포 다리목의 배와 딸기 장사 얘기는 아직도 회자된다. 구포다리는 1996년 구포대교가 놓일 때까지 구포와 서부경남을 잇는 유일한 다리였다. 강서에서 구포로 넘어오는 구포 다리목은 버스정류소였는데, 이곳에서 지역민들은 구포의 명물 배와 딸기를 팔았다. 이들이 버스 창가에 매달려 '내 배 사이소' '내 딸 사이소'하는 모습은 웃지못할 소극(笑劇)으로 남아 있다.
● 구포나루의 님
구포(龜浦)는 흘러간 포구다. 거북의 등처럼 질길 것 같던 포구의 생명력은 다리가 놓이면서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지하철 2호선 구포역이 들어서면서 구포나루는 터를 완전히 잃었다. 구포다리 곁에 구포대교가 건설됐고 강서로 가는 지하철 교량이 놓였다. 게다가 다대항 배후도로(왕복 8차로)가 지나가면서 무수한 다릿발이 박혔다. 강이 뭉턱뭉턱 잘려나간 형국이다.
시인 양우정은 무슨 까닭으로 구포나루 님을 그토록 간절히 찾았을까. 구포에 가면 기다리던 무엇이 있는 것일까. '…메나리꽃 하나 따서/물에 던지면/고이고이 흘러서/끝없이 가지/에-헤루 흘러서 어데를 가나/ 구포나루 님을 찾아 흘러 간다네'(양우정 '낙동강' 중)
구포에는 물목의 흥성함과 일제 수탈의 얼룩이 배어 있다. 구포가 나루터로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628년 조창이 설치되면서부터다. 강 연안의 고을에서 거둬들인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가 3개 였다. 구한말 부산 경남의 상권을 휘어잡던 구포객주와 1912년 조선인들이 세운 구포은행, 1930년대에 번성했던 정미업 등은 모두 구포 조창에서 발원한다.
나루 경기가 활발할 때 구포에는 보부상을 위한 배가 따로 떴다고 한다. 보부상들의 배는 낙동강을 따라 화원 상주 안동까지 갔다. 그 시절의 보부상들이 불렀다는 '구포 선창노래'는 지금 들어도 흥겹다.
'낙동강 칠백리 배다리 놓아 놓고/봄바람 살랑살랑 휘날리는 옷자락/물결 따라 흐르는 행렬진 돛단배에/구포장 선창가엔 갈매기만 춤추네'.
구포교가 놓인 뒤에도 끈질기게 뱃길을 지키던 구포~대동 나룻배는 1980년대 중반께 퇴장했다. 마지막까지 나룻배를 붙잡고 있었다는 이삼용(72) 씨는 세월 저편의 나룻배를 이렇게 기억한다. "하나는 철선, 하나는 목선이었는데 주로 김해 대동 사람들이 왔다갔다 했어요. 보따리 들고 다라이 이고 구포장이나 하단장에 오는 사람들이 많았지. 그때 대동 가는 데는 버스보다 배가 더 빨랐어요. 주말이면 행락객도 더러 탔지. 그러다가 사라졌어."
● 다리가 전하는 말
지난 2월 동강난 구포다리에서 인상깊은 장면이 연출됐다. 양윤호 감독의 영화 '가면'이 촬영된 것. '가면'은 잔인한 연쇄살인 복수극에 숨겨진 충격적 비밀을 파헤친 스릴러물. 구포다리가 시나리오상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양 감독은 1000만 원을 들여 안전감정을 받고 촬영을 감행했다. 주인공 김민선과 김강우는 다리 위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열연했다. 신세대 열혈 형사 김강우는 명품 오토바이 '듀가티'를 타고 끊어진 다리를 비행기 활주로 삼아 달렸다.
당시 장면을 담은 스틸사진을 보니 동강난 구포다리가 세상의 막다른 길 같았다. 철거의 운명을 알고 있는듯 비장함도 묻어났다. 구포다리의 막지막 모습이 스크린 속에 들어간 것은 다행이다.
구포다리의 대저쪽 다리문은 굳게 막혀 있었다. 다리를 지키는 사자상은 여전히 눈을 부라린다. 할수 없이 구포대교 인도를 간신히 따라 걸으며 구포다리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말을 거니 대꾸를 한다.
-곧 철거될텐데, 기분이 어때? "철거하고 안하고는 너네 마음 아니니. 이런 흉물 나도 보기 싫어. 철거하든 보존하든 빨리 결정했으면 좋겠어."
-철거를 바라는구나.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련이 있구나. "내 나이가 일흔넷이야. 역할을 다 했으니 미련은 없어. 그렇지만 뭔가 아쉬워. 나와 함께한 숱한 시간, 그 많은 추억과 애환은 어디에 내려둔담? 내가 없어지고 나면 그걸로 끝이 아닐까. 그래도 꼭 철거를 해야겠다면 사료관을 멋지게 지어봐. 사자상이나 다리발 몇 개라도 남아 있게. 그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네들을 위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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