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워온 자식' 그 은근한 위협과 해학의 발원지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죽계제월교(청다리). 이곳에서 '다리 밑 자식'이란 말이 비롯됐다고 한다. 이곳의 죽계천은 선비촌과 소수서원을 끼고 흐른다. 박창희 기자 |
"넌 다리 밑에서 주워다 길렀다!"
어릴 때 누구나 한 두번쯤 들어봤을 농담이다. 이 소리를 들으면 괜시리 슬프고 심란했다. 엄마 아빠가 엄연히 있는데 주워다 길렀다니….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말이지 않는가. 마음 약한 아이는 "아니다"고 강변하다 끝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 연사냐, 역모냐
'다리밑 자식'의 발원지는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청다리라고 한다. 여기서 '다리 밑 자식'이 태어났다는 것. 전설은 두 갈래로 흐른다. 하나는 조선 중기 유생들의 연사(戀事)의 산물이란 거고, 또 하나는 역모(逆謀)의 소산이란 거다.
"이 얘기는 소수서원과 관련이 있어요. 소수서원은 국내 최초의 사립대학(사액서원)이었죠. 서원에 공부하러 온 젊은 유생들이 인근의 처자나 주막 기생들과 놀다가 애를 낳았던가 봐요. 키울 수가 없으니 죽계수 청다리 밑에 애를 버렸을테지요. 당시 자식이 없고 후손이 귀한 집에선 이 아이들을 주워다 길렀던 것 같아요. 여기서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이 나왔다고 해요. 제가 어렸을 때도 그 소릴 듣곤 했지요."
영주문화원 길인성(46) 사무국장의 얘기다. 영주문화원 홈페이지에도 이같은 내용이 소개돼 있다. 정분이 나서 아이를 낳게 되면 어떤 유생은 처녀와 짜고 부러 청다리 밑에 아이를 버려놓고 아이를 주운 것처럼 가장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영주 순흥에서 '청다리 옛집'이란 식당을 운영하는 40대 여주인도 비슷한 얘기를 해 줬다.
이와 달리, 소수서원에서 일하는 박석홍(55) 학예연구원은 정축지변이 낳은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청다리의 원조는 죽계제월교(竹溪霽月橋)예요. 제월교는 퇴계 이황이 붙인 이름이라고 하죠. 순흥은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순흥 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다 발각돼 참화를 입은 곳입니다. 1457년 정축지변이죠. 그 때 살아남은 아이들을 주변에서 데려다 키웠는데, 부모를 몰라 '청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은유법을 사용한 거예요."
청다리의 '청(菁)'자는 우거지다 또는 무(무우)란 뜻을 갖는데, 여자의 다리(종아리)가 무에 비유되곤 하므로, 곧 '이름모를 여성의 다리 밑'으로 풀이될 수 있다고 박 연구원은 설명했다.
그럼, 유생들의 불장난이란 얘기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박 연구원은 "그건 일본인들이 퍼뜨린 낭설"이라고 잘라 말했다. 일제 강점기인 1923년께 일본인들은 선비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서원·향교철폐령을 내렸는데, 이때 청다리에 얽힌 얄궂은 이야기를 퍼뜨려 유림의 이미지를 안좋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문헌기록이 따로 없거니와 둘 다 전설로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든, 정축지변의 참화 현장이 청다리였다는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 피의 역사
순흥(順興)의 역사는 금성대군(1426~1457)이 개입되면서 풍파가 일어난다. 금성대군은 단종을 받들고 있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금성대군은 평민으로 강등되어 순흥으로 유배된다. 이 와중에도 금성대군은 기개를 꺾지 않고 다시 거사를 도모한다. 새로 부임한 순흥 부사 이보흠이 금성대군의 처소를 찾아와 뭔가 은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거사에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얼마나 되겠소?"
"제게 잘 훈련된 군사 삼백이 있고 관속과 경내외 장졸을 합치면 칠백 가량이 됩니다."
"부사의 뜻이 참으로 기특하오. 영남 각지에 격문을 보내 세를 규합 합시다. 영월의 상왕(단종)을 하루빨리 복위시켜야 하오."
금성대군은 이보흠의 손을 잡고 어금니를 굳게 깨문다. 치밀하게 진행되던 거사는 순흥도호부의 관노 하나가 밀담을 엿듣고 격문을 훔쳐 조정에 밀고하면서 풍비박산이 된다. 그러잖아도 눈엣가시같은 금성대군을 호시탐탐 제거할 날만 기다리던 수양과 한명회는 일각을 지체 않고 군사를 보내 닥치는대로 베고 찌르고 불태워 순흥을 피바다로 만든다. 관군은 사방 10리 이내의 세살 이상 양반 남자는 모두 참형에 처했다. 죽임 당한 자가 수백인지 수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 처형지가 '제월교(청다리)'였으며, 당시 핏물이 죽계천을 따라 7km에 달하는 피천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피의 역사는 '피끝'(또는 핏걸)이란 지명으로 남아 있다. 세조 3년, 1457년의 일이다.
이후 조정은 순흥도호부를 폐하고 고을 자체를 없애버렸다. 이 사건으로 금성대군은 '위리안치' 되었다가 사약을 받는다. 사건이 있은 후 순흥은 230여년 간 이름없는 고을로 숨죽여 살았다. 1738년(영조 14)에 금성대군이 신원되고 역사는 비로소 역모를 절의로 재평가 한다.
● 위리안치
영주시에서 부석사 방향으로 차로 10여분 가면 소수서원이다. 서원을 지나 선비촌으로 가다 보면 다리 하나가 나오는데 그게 청다리다. 길이 32m, 폭 11m의 자그마한 콘크리트 강교인데, 겉으론 볼품이 없다. 다리 옆에 '죽계제월교(竹磎霽月橋) 경희경인오월립(康熙庚寅五月立)'이라고 새겨진 석비가 있다. 퇴계가 이름 붙인 제월교를 숙종 36년(1710)에 다시 세웠다는 말이다. 다리 아래로 소백산에서 흘러내린 죽계천의 가녀린 물줄기가 큼직큼직한 강돌을 쓰다듬으며 흐른다.
'무심한 역사로고….' 돌아서려다 선비촌 쪽 다리께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본다.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400m'. 궁금증이 일어 따라가본다. 순흥 향교를 곁눈질하며 향교 앞 다리를 건너 과수원 사잇길로 접어드니 탱자나무 울타리가 나온다. 위리안치? 역사책에서 본듯한 단어다. 사전을 들춰보니,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형벌'로 나온다.
현장에는 돌우물이 복원되어 있었다. 우물은 깊이 2m, 직경2m 정도 돼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답답함과 공포감이 함께 음습해왔다. 유적지를 둘러싼 가시가 권력욕과 탐욕이 빚은 역사를 찌르는 것 같다. 이런 역사가 있었구나! 순흥이 다시 보였다.
● 다리 밑 자식
'다리 밑 자식'이란 말은 중의적이다. 다리(橋)와 다리(脚)는 동음이의어이고, 아이가 어머니의 '다리 밑'에서 태어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리(橋)가 다리(脚)의 은유이고, 다리(脚)가 다리(橋)의 환유(換喩)라는 것도 재미 있다. 헷갈린다고? 그럴 것이다. 이 농담은 그걸 노렸을 수도 있다.
이 농담이 지역성을 갖는다는 것도 흥미롭다. 서울의 경우 청계천이나 염천교, 부산은 영도다리, 대구는 신천교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청다리는 영주에서만 통한다. 그 지역의 대표적 다리가 소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감을 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된다.
순흥의 피의 역사에 끈을 대어 얘기한다면, '다리 밑 자식'은 단순한 우스개로 넘길 수 없다. 다리가 그냥 다리가 아니고, 호통을 치지 않아도 따끔한 '일침'이 될 수 있음이다. 실제로, 어른들은 공연히 이 농담을 늘어놓지 않았다. 아이의 버릇을 고칠 심산이거나, 못된 성질을 길들일 방편으로 '다리밑 자식'을 끄집어냈다. 그러다 아이가 알아들을만하면 슬쩍 웃음으로써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말하자면 이 농담은 자식 사랑의 해학적 표현이었던 셈이다.
'다리밑 자식'이란 말이 생겨난 그 다리 밑에는 지금 할 일 없는 노인들이 나와 장기나 화투로 세월을 낚거나 피서객들이 더위를 쫓고 있다. 이들이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고 아이들을 놀리던 그 어른들이라면 세월이 무상하다. 다리의 야사는 이렇게 또 한 페이지가 넘어간다.
출처 : 국제신문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본 포스트는 박창희 기자님의 허락하에 게제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