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다리의 애환을 지켜보며 자갈치 앞바다를 쉼없이 오가는 영도 도선. 앞에 보이는 영도다리는 2010년께 도개 기능을 갖춰 확장 개통된다. 박창희 기자
다리가 벌커덕 들린다. "히야~저것 봐라." "어, 다리가 다리를 드네." 구경꾼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기술이 마법과 통하던 시대, 도개(跳開)의 장관은 사람들의 넋을 빼놓았다. 그러다 어느날 철커덕 닫혀버린 다리. 추억은 파도를 탔고 들림은 추억이 되었다. 45도 각도로 번쩍 일어서던 도개의 추억이 되살아난다고 한다. 영도다리 복원 얘기다. 그 말 많고 시끄럽던 다리. 눈물과 상처, 기다림과 만남, 이별과 떠남의 근대 기념물. 우리들 추억의 고향.
● 자본이란 이름의 전차
영도다리가 결국 '재개발'이란 이름의 전차에 길을 내주고 수술대에 올랐다. 오랜 논란 끝에 내려진 결론은 '복원을 전제로 한 재시공'. 지난 달 6일 부산시와 롯데건설은 영도다리 옆 제2롯데월드 공사현장에서 안전기원제를 겸해 임시교량용 강관파일을 박았다. 공사는 임시교량을 먼저 만들고 본교량을 철거, 복원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교량은 6차로(현 4차로)로 넓어지며 높이가 1m가량 올라간다. 공사비 800억 원은 롯데건설이 전액 부담한다.
여기까지 오는 데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자본과 편리의 논리에 맞서 역사 문화적 명분이 체면치레를 한 모양새긴 하다. 명색 부산시 문화재이니 어느 정도 복원은 되겠지만 '현상 변경'은 불가피해졌다. 교각과 상판, 난간을 전부 철거, 해체한 다음 재시공되기 때문이다. 시공사 측은 뜯어 보고 쓸 자재가 있는지 보겠다고 한다. 어쩌면 달콤한 도개의 추억을 앞세워 원형 파괴를 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말뚝이 꽂혔고 공사가 시작됐다.
영도다리는 이렇게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한 시대를 건너간다. 잘 가라, 영도다리여. '들려서' 다시 만나자.
● 들림의 추억
영도다리가 다시 '들린다'는 대목은 음미할 만하다. 비록 전시용이라 할지라도, 도개 기능을 되살리기로 한 것은 단순한 기능 재현 이상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도개식 교량으로는 영도다리가 국내 최초 였다. 1934년 11월 23일 개통식이 있었는데, 다리의 일부가 하늘로 치솟는 장면을 보기 위해 무려 6만 명이 몰렸다.
들릴 때 법칙이 있었다. 개통 초기엔 하루 7번 한번에 20분간 다리를 들었다. 다리를 올리고 내릴 때는 사이렌으로 신호를 했다. 다리를 드는 횟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어 뒤에 가선 하루 두 번(오전 10시, 오후 4시)을 들고 내렸다. 도개 횟수는 다리 위 교통량의 증가와 반비례했다. 통과 선박이 범선인 경우 예인선이 끌고가도록 했다.
도개 기능은 1966년 9월부터 중지된다. 교통량 증가와 급수관 통과, 경제적 부담 등이 이유였다. 다리를 고정시키자 통과 높이인 7.51m(밀물)~8.87m(썰물)에 걸리는 배들은 알아서 딴 데로 갔다. 영도다리엔 아직 도개 장치 일부가 남아 있다.
그런데 과연 다시 들릴까? 이런 의문은 '든다'는 것이 간단한 기술적 문제만이 아니라는 데서 출발한다. 현대의 속도주의가 이를 용인하고 참아 주겠느냐는 거다. 가령, 다리를 든다고 1시간 정도 영도다리를 막는다고 할때 시민들이 불평하지 않을 것인가. 영도다리의 교통량은 이미 포화 상태다. 최근 한 조사를 보면, 중앙동→영도 구간은 하루 통행량이 2만8000여대, 영도→중앙동은 하루 3만3600여대다. 이 많은 차량을 묶는다는 것은 결단이 필요하다. 이 결단은 역사·문화 마인드가 바탕이 돼 있어야 내릴 수 있다.
● 영도 도선의 생명력
영도로 들어가는 다리는 1934년 놓인 영도다리(대교)와 1980년 1월 30일 개통된 부산대교 두 개다. 중구 중앙동과 영도구 봉래동을 잇는 부산대교는 길이 260m, 폭 20m, 양쪽 인도가 각 2m, 통과 높이는 14m이다. 바다에 무지개처럼 걸린 빨간 아치가 여수(旅愁)를 자극한다.
영도다리가 형님이라면 부산대교는 아우인 셈. 덩치는 아우가 더 크다. 이 두 다리를 구경하기 좋은 장소가 영도쪽 '봉래나루길'을 따라 북항 쪽으로 조금 가면 만나는 소공원이다. 밤이 되면 형님·아우가 서로 다른 등불을 켜고 소곤소곤 대화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큰 다리가 두 개나 놓였음에도 영도~자갈치 도선(나룻배)은 건재하다. 다리가 문제가 아니라, 대도시 한복판에 나룻배같은 도선이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도선은 영도 대평동과 중구 자갈치를 7~8분만에 건너간다. 버스는 물론 승용차보다 더 빠르다.
"영도 대평동이나 신선동에서 택시를 타고 자갈치로 갈 경우 보통 택시비가 2000~3000원 나옵니다. 막히면 더 나오죠. 그런데 배를 타면 막힐 염려가 없는데다 900원(초등생 500원)이면 되죠." 1985년부터 영도 도선을 운영해온 선주 김희수(51) 씨의 얘기다.
영도 도선은 현재 1대(정원 48명) 뿐인데 선장 2명이 교대로 일하며 하루 55~60회 왕복 운항한다. IMF(국제구제금융) 사태 직전엔 하루 1300명까지 이용했다고 하나, 지금은 대략 400명 정도라고 한다. 선친의 가업을 잇고 있다는 선주 김 씨는 "영도다리 공사가 본격화되면 손님이 늘어날 것으로 본다"면서 "배를 한대 더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도선의 역사는 영도다리의 전사(前史)에 해당된다. 부산시사 등을 보면 1890년 영도 봉래동~용미산(옛 시청 인근) 사이 무동력 나룻배가 처음으로 다니기 시작한 뒤로, 1914년 동력선이 자갈치~대평동(2척·일본인 운영), 용미산~봉래동(한국인 운영)을 왕복했다. 이 도선의 전통이 영도다리와 함께 '굳세게' 숨쉬고 있다.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가 새겨진 현인 선생 노래비.
● 굳세어라 금순아
현인 선생은 오늘도 영도다리로 출근해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른다. 다리 난간에 초생달이 걸리면 '신라의 달밤'을 뽑기도 한다. 영도 쪽 다리 입구에 현인 동상과 노래비가 서 있다. 동상 오른발에 발을 걸치면 저절로 노래가 나온다. 탁탁, 발장단을 맞추다보면 다리 난간에서 추억이 춤을 춘다.
남포동쪽 영도다리 밑길은 입구만 있고 출구가 막혔다. 제2롯데월드 공사장 탓이다. 이곳엔 아직 판잣집이 몇채 남아 있다.
"다리 공사가 시작되면 집 절반이 뜯긴다고 하데. 나가야지…. 남의 집이니 보상비는 생각 못하고 이사비나 좀 받을랑가."
'소문난 대구 점집'의 배남식(76) 할머니는 영도다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46년 전 대구에서 내려와 여태껏 이곳에서 버텼다는 할머니다. 유리창엔 '신수·병점·이사·도망·사주·궁합·꿈해몽'이라 적혀 있다. 찾는 단골이 아직 있단다. 그런데 '도망'은 무슨 뜻인가? "도망도 몰라? 내빼는 거. 여자가 도망 갔는데 오겠나 안오겠나 하고들 물어."
이들 점집은 6·25전쟁과 끈이 닿아 있다. 전쟁통에 생이별한 많은 사람들은 영도다리 점집을 찾아 '헤어진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하고 매달렸다고 한다. 배씨 할머니가 써붙여놓은 '도망'도 이런 맥락일테다.
'잘 들려야 할텐데…'. 영도다리를 돌아나오며 이런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들린다'는 의미는 다의적이다. 병이 걸리다, 신이 덮치다, 밑천이 바닥나다 따위의 부정적 의미도 있지만, 귀를 열고 듣거나 경쾌한 상승감을 뜻하는 긍정적 의미도 품는다.
이왕 영도다리를 들 참이면 부정적 의미는 되도록 경계하고 긍정적 의미에 방점을 찍자. 도개교는 그런 다리다. 뜻 그대로, 여는 다리이면서 열리는 다리다.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고, 갇히기보다 툭 터놓고, 조급해하기보다 기다림의 여유를 가르치는 다리인 것이다.
영도다리의 추억은 이 지점에서 무르익는다. 21세기에 다시 쓰는 영도다리 후사(後史)는 어떤 추억의 무늬가 새겨질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