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문경시 마성면 고모산성에서 바라본 진남교반 전경. 오른쪽부터 영강을 지나는 신 국도 3호선(4차로)과 구 국도 3호선(2차로)이 보인다. 그 옆의 좁고 짧은 다리가 일제때 건설된 구 진남교다. 그 밑에 문경선 철교가 있고, 신 국도 3호선이 토끼비리를 관통한다. 맨 아래에 걸린 것은 최근 들어선 된섬교다.
산중 주막거리가 반갑다. 박 선달이 침을 꿀꺽 삼킨다. 막걸리 너 얼마만이냐. 한 사발 시키려는데 분위기가 영 수상쩍다. 주모는 보이지 않고 매미소리만 요란하다. 아직 개장이 안되었나.
예가 어딘가. 도리도표(道里圖表)를 꺼내 맞춰보니 문경새재 턱밑, 고모산성이렷다. 고모산 자락을 돌아 영강이 씩씩하게 흘러간다. 박 선달이 주막을 요모조모 살핀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옳거니, 예천 땅 낙동강 삼강 뱃가의 그 주막일세. 넉살 좋고 입심 센 주모 할매 죽은 뒤 누가 지킬까 했는데 여기에 한 살림 떡하니 펼쳐놓았구나. 2005년 10월 나이 구십에 세상 버리신 뱃가 할매 유옥련. 이 시대의 마지막 주모. 내심 반가움에 다가가 마루에 엉덩이를 걸쳐보지만 허전하구나. 박 선달은 풀려던 괴나리봇짐을 고쳐 매고 뱃가 할매를 떠올린다.
주막은 초가 두 채다.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과 문경 영순의 달지주막을 그대로 재현한 거란다. 우리나라 마지막 주막의 모습이다.
● 성황당
주막거리 고갯마루에 성황당이 있다. 5~6m 높이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성황당을 앞뒤에서 호위한다. 성황당 앞의 작달막한 느티나무는 의병장 이강년 선생이 1896년 일본군과 고모산성에서 전투를 벌일 때 화재를 입은 모습 그대로다.
박 선달이 성황당 안을 빼꼼 들여다본다. 모녀의 초상화 한 폭이 모셔져 있다. 이곳을 지나던 길손들에게 허기를 달래주고 요기하며 쉬어가게 했던 떡장수 모녀의 초상화란다. 전설이 슬프다. 과거 보러 한양 가던 한 선비가 이곳에서 떡장수 딸과 눈이 맞았다. 믿는다, 믿어라 혼인 약조까지 했으나 선비는 과거급제 뒤 처녀를 잊고 말았다. 그 선비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이곳을 지난다. 옛 생각이 나서 처녀를 찾았으나 처녀는 목숨을 끊은 뒤였다. 관찰사는 밤마다 꿈에 처녀 귀신을 보게 된다. 까닭을 물으니 사모의 한을 풀어달라고 한다. 관찰사는 그 자리에 성황당을 지어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원래는 서낭당이라고 해서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는데, 300여년 전에 성황당을 지었다고 해요. 이 길이 유명한 영남대로지요. 많은 사람이 오가다보니 이런 전설이 생겨났을테고요." 문경시 엄원식(39) 학예연구사의 설명. 서낭당→성황당의 변천 과정이 흥미롭다. '길이 험하면 원망도 깊어지는 법….' 박 선달이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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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문경 오정산 층암절벽을 깎아 만든 '토끼비리'. 부산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험난한 구간이다.
토끼비리
주막거리를 나온 박 선달은 '토끼비리'를 찾는다. 고모산성을 끼고 문경 오정산(805m)의 층암절벽을 깎아 만든 길이 1㎞, 폭 1m 가량의 벼랑길. 부산 동래에서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 950여 리 중 가장 험난한 길이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다는 새재(鳥嶺)가 사실상 여기서 시작된다.
패랭이를 고쳐 쓴 박 선달이 벼랑길로 접어든다. 한발 두발 그가 내딛는 발걸음을 밟고 지친 길손들이 힘겹게 따라오는 환상에 휩싸인다. 과거 급제를 꿈꾸던 선비, 세곡을 나르던 관리와 역졸, 부임지로 향하는 신임 사또, 괴나리 봇짐을 맨 보부상, 수백리 시집길을 나선 새색시…. 이들 길손이 고갯길 굽이굽이, 잔돌 하나하나에 새긴 애환과 사연은 바로 한민족사가 아닌가.
'비리' 또는 '벼리'는 벼랑을 뜻하는 순우리말. 개가 낸 길은 개비리, 토끼가 낸 길은 토끼비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후삼국이 싸울 때 견훤에게 쫓기던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 이르렀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알려줘 '토천(兎遷) 또는 '관갑천(串岬遷)'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바위를 깎아 만든 벼랑길은 얼마나 많이 밟고 다녔는지 닳고 닳아 마치 발자국 화석처럼 돼 있다. 하기야 달리 발디딜 곳이 없어 한곳만 계속 딛다보면 이렇게 움푹 파였을 수도 있을 터. 신기한 느낌이 들어 박 선달도 발을 갖다대 본다. 옛 선인들의 고행이 이입되는 것 같아 종아리가 저릿하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영강이 여울을 만들어 호탕하게 흘러간다.
토끼비리는 바위를 U자 형태로 깎아 만든 고갯길에서 끝난다. 바람의 통로인듯 산바람 강바람이 다리쉼 하는 박 선달의 땀을 식혀준다.
● 다리 전시장
'과연 장관이로고….' 고모산성 꼭대기에 오른 박 선달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경북 팔경 중 으뜸이라는 진남교반(鎭南橋畔)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물·다리가 어우러져 길의 진경을 연출한다. 고모산을 끼고 흐르는 조령천이 고부산을 돌아나온 농암천을 만나 영강이 되는 지점에 온갖 다리가 걸렸다. 눈에 보이는 다리만 모두 6개다.
먼저 조선시대까지 이용되던 영남대로(토끼비리)는 일제시대에 건설된 구 국도 3호선(구 진남교)에 자리를 내준다. 진남교반 최초의 다리다. 차 한대 지날 정도의 폭인데, 탄광 트럭이 주로 이용했으나 지금은 인도로만 쓰인다. 이어 1960년대 말 무연탄을 실어 나르던 문경선이 놓였다. 영강을 건너 고모산 터널을 관통하는 문경선은 1990년대 말까지 석탄을 실어날랐으나 이제 폐선이 되었다.
구 국도 3호선은 1978년에 2차로로 확장된 데 이어 1999년말 다시 4차로로 넓혀졌다. 4차로 확장때 진남2교(길이 180m, 폭 19m)가 놓였다. 그런데 이 새길이 직선 형태로 펴지면서 토끼비리 절경 한자락을 뚫었다. '이런! 길의 탐욕이 역사를 무너뜨렸군.' 박 선달이 혀를 끌끌 찬다. 자연파괴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온다.
국도 3호선 아래에는 최근 '된섬교'라는 콘크리트 강교가 걸렸고, 조금 더 내려가면 중부내륙고속도로 교량이 영강을 지나간다.
이곳 국도 3호선의 뿌리는 일제의 신작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5년 일제는 점촌에서 주흘산을 넘는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냈다. 이화령(529m)이다. 전망대에 서면 멀리 충청도(괴산군) 땅이 보인다. 문경새재 옛길을 밀어낸 이화령 도로는 1998년 터널로 들어갔고, 그 옆으로 2004년 완공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지나간다.
③고모산성 내에 조성된 주막거리. 경북 예천의 낙동강 삼강주막을 재현해 놓았다. 박창희기자
새 길과 옛 길
문경은 2세기 중반 신라에 의해 계립령이 개통되면서 군사 전략지로 부상한다. 삼국이 영토 쟁탈전에 휩싸일 무렵, 신라는 진남교반 일대를 북진 거점으로 삼아 성을 쌓았다. 고모산성이다. 당시엔 이 산성 아랫길을 통하지 않고는 영남과 한양을 왕래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최근 5세기 대의 지하 목조건축물과 저수지, 토기 목기 유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신라의 점거 흔적이었다. 저수지 바닥에 '沙伐女 上'(사벌녀 상)이라 적힌 청동장식품이 나왔다. '사벌'(沙伐)은 지금의 경북 상주를 말하며 신라시대 문경 일대는 사벌주에 속했다.
새 길이 생기면 옛 길은 소멸하지만, 진남교반에서는 옛길인 다리들이 여전히 발언권을 행사한다. 일제가 놓은 신작로 다리와 산업화시대에 건설된 철도, 신·구 국도의 교량이 각기 역할을 잇거나 분담하며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길과 새길이 다리를 건너가며 서로 서로 길을 묻는 것 같다.
구 진남교가 놓인 자리는 원래 뱃가(나루터)였다고 한다. 진남교반에서 지난 1960년대 말부터 '진남매운탕' 식당을 운영해온 김영희(여·47) 씨가 이 얘기를 해 줬다. "일제 때는 이곳까지 낙동강 소금배가 올라왔다고 하대요. 낙동강-영강-조령천이 수운통로였다는 말이죠. 그 소금배에 실린 것들이 새재를 넘었을테고요. 어머니한테서 그 얘길 들었어요."
'수운' 이란 말이 걸린다. 실현될 지는 전혀 알수 없지만, 만약, 경부운하가 추진된다면 낙동강-영강-조령천을 따라 물길이 열리게 된다. 무리해서-아주 파괴적으로-운하를 뚫는다고 가정하면 진남교반의 다리 6개 가운데 4~5개는 뜯겨야 한다. 그 때도 진남교반이란 아름다운 이름이 남아 있을까. 박 선달은 도리질을 친다. 수 천년을 흘러온 산과 물, 길의 역사가 저 영강에 굽이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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