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포구의 쇠락을 슬퍼할 필요없다 | ||||||||||
황산대교를 지났다. '갱갱이'다. 갱갱이는 충남 논산 근방에서 강경(江景)을 이르는 말. 강경을 충청도 사투리로 길게 발음한 거란다. 해가 금강을 건너 서해로 스르르 넘어간다. 노을이 곱다. 읍내에 들어서자 젓갈 냄새가 온몸에 감겨온다. 향긋하다. 비린내를 풍길 것이란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갔다. '갱갱이'는 정겨운 우리말임에도 요즘 쓰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한다. 소멸 직전의 토속어 한마디가 강경포(황산나루)의 성쇠를 대변하는 듯하다. 포구가 쇠락하면서 말이 헐거워졌고, 동시에 삶이 팍팍해졌다. 강경포는 그렇게 시간에 떠밀려가고 있었다. ● 황산 메기
강경에는 노을에 감염된 지명이 여럿 있다. 황산천과 황산대교, 채운산(彩雲山)이 그렇다. 강경읍 채산리에 있는 채운산은 해발 56m의 야산이지만, 산 너머에 걸리는 노을이 천하의 명작이다. 백제시대 때 왕족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후백제 때에는 그곳 지네와 용이 승천해 노을이 더 빨개졌다는 전설이 있다. 강경 시인 박용래(1925∼1980)는 고향 노을을 끔찍이 사랑했다. 까치말 채운들 부투골 낭청이 돌꽃메 두테골 거름실…. 그가 지은 시의 '집'에는 맛깔진 우리말이 곰삭아 은은한 향을 풍긴다. '오동꽃 우러르면 함부로 노한 일 뉘우친다/잊었던 무덤 생각난다…'(박용래 '담장' 중) 시인은 노을이 그리웠던지 일찍 죽었다. ● '객주'의 그 장터 '…봄과 여름은 고기를 잡고 해초를 뜯느라 비린내가 포구에 넘치고, 토선(土船)과 딴장이, 당도리선들이 황산(黃山)과 세도(世道)로 마주 나누어진 포구에 담처럼 둘러서서 꽹과리를 쳐댔고 화장(火匠)들이 내뿜는 연기로 포구의 하늘은 다시 암회색 바다였다. 한 달에 여섯 번이나 열리는 장에는 전라도의 곡식과 경강(京江)으로 가는 조곡과 화물이 포구에 쌓였다….' 소설가 김주영이 '객주'에 그려놓은 강경 옛 장터의 모습이다. 시끌벅적한 장터 풍경이 선연하다. 강경은 1920년대에 '1원산 2강경'이라 해서 전국 2대 포구였고, 해방 전까지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강경천을 낀 옛 장터거리에는 극장, 술집, 요정, 정미소, 젓갈집 등이 즐비했다. "말도 마유. 저기 옥녀봉 아래가 '서포 뱃턱'이라 부른 강경포인디, 한창 때는 하루에 100여 척의 배가 드나들었다고 해요. 확 트인 자리가 무진장 넓잖소. 금강 수운이 대단했던기라. 내륙의 산물과 군산 쪽의 해산물이 죄다 여기에 모였응게 얼마나 붐볐것수." 강경 토박이라는 봉만영(85) 씨의 말이다. 봉 씨는 "그 대단하던 것이 다 흘러가 부렀어"라며 "이제 볼 것은 젓갈밖에 없다"고 얘기한다. 서쪽 하늘에 노을이 한층 붉어졌다. 옛 기억을 더듬는 노인의 흐린 눈 속으로 노을이 배어든다. 봉 씨는 "여기 왔으면 미내다리를 보고 가. 그쪽 노을도 참 좋아"라고 일러주곤 자리를 떴다. ● 나루터가 젓갈 명소로 황산나루터에는 수상레저타운이 들어서 있다. 모터보터, 수상스키, 바나나보트, 웨이크보트 등 탈것들이 선착장에서 해질녘 손님을 기다린다. 수상스키 한대가 강물을 가르며 부여 쪽으로 내달린다. 논산천과 강경천을 받아 흐르는 이 곳의 금강은 '대하'의 풍치가 있다. 강물은 거무죽죽한 탁류다. 황산대교는 나루터 바로 아래에 들어서 있다. 1987년이 준공된 이 다리는 길이 1050m, 폭 12m로 건설 당시 아시아 최장 연속교량이었다. 강경 쪽에서 교각을 놓아 상판을 한번에 16.7m씩 연결하고, 교각마다 미끄럼판을 댄 후 400t급 수평쟈키로 밀어내는 식으로 64번을 반복해 이음매가 없는 교량을 만들었다. 강경쪽 들머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쓴 '황산대교비'가 당당하게 서 있다. 나루터 옆의 '황산옥' 식당 지배인 모종춘(46) 씨는 "다리 준공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 여파가 몇달을 갔다고 한다"며 "요즘도 종종 그 얘길 하는 사람이 있다"고 귀띔한다. '황산옥'은 80여년 간 3대가 대를 이어 운영해온 황복, 메기찌개 집이다. 나루터는 기울었으나 황산옥은 굳세게도 버텼다. 그 사이, 강경은 젓갈 고장으로 변신했다. 읍내에는 온통 젓갈 가게였다. 강경전통맛깔젓사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젓갈 가게만 150여 곳이고, 이 중 30여 곳은 50평 이상의 토굴을 갖춘 '백화점급' 업체다. 맛깔젓조합 박종률(49) 조합장은 "강경 젓갈은 전국 유통의 60%를 점하고 작년 매출이 300억 원에 달했다"며 "가을철 젓갈 축제를 보면 진가를 알게 된다"고 말했다. ● 아름다운 소멸의 꿈 강경에는 일제시대의 얼룩들이 있다. 화려한 젓갈 가게의 간판 뒤에 일제가 세운 건물과 주택, 다릿발이 남아 있다. 쓰러질듯 쓰러지지 않는 잔재들이 강경의 추억을 괴롭힌다. 100여 년의 시간이 이렇게 한 지역 안에 고스란히 공존하는 곳도 찾기 어렵다. '은진(恩津·논산의 옛 지명)은 강경으로 꾸려간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었고, 봄철이면 올라오던 황어나 웅어(우여)도 올라오지 않는다. 금강 물길을 따라 서해를 오갔던 고깃배들은 강에서 나와 제방 위에 올라 앉았다. 황산나루 제방에는 놀뫼호, 옥녀호, 금강호, 강경호, 황산호가 줄줄이 늘어서고 그 뒤를 배 형태의 강경젓갈전시관이 지휘하듯 버티고 앉았다. 제방 위의 배들은 명찰을 고쳐 달고 관광객을 부른다. 강이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도 배들은 돌아보지 않는다.
미내다리 옆 강경천에는 시멘트 통짜 교각 4개가 박혀 있다. 일제시대 건설된 호남선 철교였다는데 6·25때 파괴된 뒤 방치된 것이라고 한다. 두 개의 다리가 묘하게 대비된다. 이를테면 미내다리는 관상용(觀賞用)이고 일제의 교각은 폐기물이다. 채운면에 산다는 차복례(72) 할머니는 그래도 미내다리를 섬긴다. "죽으면 염라대왕이 미내다리를 보고 왔느냐 하고 묻는다잖여. 이 다리를 자기 나이대로 왔다 갔다 하면 오래 산다고 그려…." 황산나루 쪽 하늘이 붉게 타들어간다. 장려한 하루가 지워진다. 태어난 것은 다 소멸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역사든 누구나 아름다운 소멸을 꿈꾼다. 저 다리들도 마찬가지겠지…. 강경, 아니 갱갱이에선 생각조차 젓갈의 짠맛 속에 곰삭아가는 것 같다. 출처 : 국제신문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본 포스트는 박창희 기자님의 허락하에 게제합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