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솥바위 아잉교!" 의령 정암리 주민인 김호 씨가 정암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 씨는 50년 넘게 정암과 정암교를 지켜봤다고 한다. 정암 왼쪽이 정암나루터다.
솥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것도 무쇠 가마솥이. 장작불 땐 무쇠솥등은 얼마나 따뜻하던가. 끓어넘치는 솥의 눈물, 가마솥맛 소고기국은 또 어떻고…. 솥은 인류를 먹여살린 도구다. 석기시대엔 돌솥이, 토기시대엔 토기솥이, 청동기시대엔 동복(銅腹)이, 철기시대엔 철복(鐵腹)이 밥을 해 냈다. 이후 알루미늄제·스테인리스제 솥이 나오고 첨단 전기압력솥이 등장했지만, 진짜 밥맛은 역시 무쇠 가마솥이다. 세발 달린 솥을 말하는 '정(鼎) 자'는 뜻풀이가 아주 좋다. 정보(鼎輔)는 삼정승을 뜻함이요, 정갑(鼎甲)은 과거시험에 최우등으로 급제한 세 사람이며, 정식(鼎食)은 진수성찬이고, 정내(鼎鼐)는 재상의 자리, 정조(鼎祚)는 임금의 자리다. 풍수지리설로도 '정(鼎)'은 재물을 상징하고, 주역의 정괘 역시 발전을 뜻하는 괘다. 이걸 보면 가마솥이 저절로 끓어오를만도 하다.
● 남강의 솥바위-솥바위 정암 중심 반경 20리 안에서 큰 부자 나온다
경남 의령의 관문인 남강 정암나루에는 솥을 빼닮은 바위가 있다. 정암(鼎巖)이다. 반쯤 물 위에 드러나 있는데, 물 밑에는 솥다리처럼 세 개의 큰 기둥이 받치고 있다고 한다. 의령 사람들은 이 곳의 남강(南江)을 아예 정강(鼎江)이라 부른다.
이런 전설이 있다.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8㎞) 이내에서 큰 부자(인물)가 나온다. 그 지점은 솥바위 밑의 다릿발 세개가 뻗어난 방향이다 하는. 의령 사람들은 이 전설이 현실화되었다고 흥분하면서 '실례'를 든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의 출생지가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솥바위에서 8㎞)이고, LG그룹 고 구인회 회장은 진주시 지수면(7㎞)에서 태어났다. 효성그룹 고 조홍제 회장은 함안군 군북면(5㎞)이 고향이다. 이들 세 사람은 삼성(三星), 효성(曉星), 금성(金星, LG 창업 당시 이름) 등 기업 이름에 모두 '별 성(星)'자를 썼다. 게다가 이병철 회장은 호암(湖巖), 구인회 회장은 연암(軟巖)이란 호를 써 공교롭게도 '바위'를 품고 있다. 이게 다 솥바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암리 일대에 알부자가 많고 인심이 좋은 것도 솥바위 때문이라고 한다. 주민들은 섣달 그믐이면 솥바위에 금줄을 치고 치성을 올린다. 솥바위를 찾아 창업운과 시험 합격 등을 기원하는 외지인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이쯤되면 솥바위가 숫제 보물단지다.
● 정암을 다릿발로?-1930년 하마터면 정암교 다릿발 받침 될 뻔한 솥바위
이 솥바위가 하마터면 교각 받침이 될뻔 했다. 1930년 초 일제는 정암교를 설계하면서 솥바위 위에 다릿발을 놓으려 했다. 수중 자연암석인 솥바위를 활용하면 다릿발을 줄일 수 있고 교량이 튼튼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같은 설계를 바꾼 이가 일본의 토목 컨설턴트인 가바시마 마사요시(樺島 正義, 1877~1949) 씨였다. 가바시마 씨는 일본을 대표하는 경관파 교량 엔지니어. 1931년 정암교 건설 예정지를 찾은 그는 주변 경관을 주의 깊게 관찰한 뒤 정암교의 위치를 솥바위에서 위쪽으로 40~50m 떨어지게 했다. '솥바위를 보존하고, 다리에서 정암을 바라볼 수 있게, 또 솥바위와 다리가 경관적으로 조화되게' 설계 변경을 유도한 것.
이 비화는 도쿄대 토목과 나카이유(中井裕) 교수가 쓴 '근대 일본의 교량디자인 사상'이란 책에 나온다. 이를 소개한 동아대 강영조(도시계획 조경학부) 교수는 "가바시마 씨의 경관 안목이 아니었더라면 솥바위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0년 전후 경상남도의 토목과에는 일본 공옥사(攻玉社)공고 출신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정암교 설계 당시 경상남도의 토목과장은 우에다 마사요시(上田 政義) 씨. 그는 츠노다(角田), 이야마(井山) 씨 등 고교 후배들을 불러 경남의 주요 교량 공사를 맡겼다. 남지교(1932. 12), 낙동교(구포교, 1933. 1), 적포교(1935. 7), 정암교(1935. 5) 등은 이들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근대 교량사에는 일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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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건설된 구 정암교와 정암루. 정암루는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의병장의 전투지휘소였다. 박창희 기자
승첩의 기억-정암루 - 의병사 빛나는 곽재우 정암진 승첩 지휘소
정암교가 놓인 자리는 곽재우 의병의 승첩지이다. 강토가 왜군에 짓밟히고 있을 때 곽재우는 분연히 떨쳐 일어나 창의(倡義)의 깃발을 세웠다. 때는 임진년(1592년) 5월 중순. 경남 함안을 점령한 왜장 안고쿠지는 왜병 2000여 명을 이끌고 의령 정암진(鼎巖津)으로 향했다. 정암진은 부산 마산에서 전라도로 가기 위해서 건너야 하는 요충지. 안고쿠지는 조선인 포로를 동원하여 도하 지점을 정하고, 진창이 없는 곳에 나무 팻말을 꽂아 두었다.
첩보를 입수한 곽재우는 밤 사이 의병을 동원해 통과지점 팻말을 늪지대로 돌려 놓고, 남강 북안의 정암진 일대에서 매복했다. 날이 밝자 왜병이 도강을 감행했다. 곽재우의 공격 명령에 따라 숨어있던 화살들이 쏟아졌다. 남강변 진창에서 왜병 선발대가 픽픽 쓰러졌다. 질세라, 왜군이 총진격을 감행하자 곽재우는 적의 주력을 유인해 궤멸적 타격을 가했다. 의병사에 빛나는 정암진 승첩이었다.
구 정암교를 굽어보는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정암루는 곽재우의 전투지휘소였다. 정암루는 언제봐도 의연하고 호기롭다. 붉은 옷에 구름같은 백마를 탄 곽재우가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다. 조선 중기에는 이 곳에 취원루(聚遠樓)가 있었다는데 소실되었고, 1935년 지역유림에서 세운 정암루는 6·25 전란때 불에 탔다. 지금의 것은 1953년 지방 유지들이 재건한 것이다.
● 뱃머리 돌려라 - 6·25때 다리 파괴된 후 3~4년간 나룻배가 다리 역할
정암교가 놓인 후 정암나루는 자연 쇠퇴했다. 그러다 6·25때 정암교가 폭파, 파손되면서 다시 나룻배가 등장했다. 의령문화원 성수현(68) 사무국장은 "다리가 역할을 못하니 나룻배가 떴지. 한 3~4년 다녔을거요"라며 먼 기억을 되살린다. '정암 뱃사공 노래'가 불린 것도 이 즈음일 것으로 보인다. 구전 뱃노래다 보니 부르는 사람마다 가사가 조금씩 다르다. 다음은 의령군청이 제공한 가사다.
정암에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우리님 오시는디 마중을 갈거나
너이가 날같이 사랑을 준다면/까시밭 천리라도 맨발로 갈거나
간다 못간다 얼매나 울었던고/정거장 마당이 한강수 되노라
(후렴) 아이고 되이구 뚜댕구 뚜댕구 성화가 났네 흥~
'정암 뱃사공 노래'는 시적 운치가 있고 가락이 살아 있다. '우리님'은 솥바위의 은유로도 읽힌다. 솥바위를 지켜야 임을 볼 수 있고, 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거다. 삼정승이나 큰 부자가 되지 않아도, 깜냥껏 자족하며 살면 되는 것. 이게 강촌의 정서요 민초들의 사랑법이다.
어떻게 부르나 싶어 의령문화원에 문의했더니, 성수현 사무국장이 곡조를 흥얼거려 주었다. '정암에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 간신히 흐르는 목소리에 목이 멘다. 앞 부분은 경기민요 비슷하고 후렴구는 경쾌한 '밀양아리랑'을 조금 닮았다. 되살려 퍼뜨리면 의령의 자랑이 될 것 같았다.
정암교는 지난해 확실히 신·구 임무교대를 했다. 구 정암교(길이 259m. 폭 6m)는 2006년부터 차량통행이 금지되어 보행만 가능하다. 덕분에 이 다리가 멋진 산책 코스로 변했다. 이 곳을 걷다가 만난 정암리 주민 김호(76) 씨는 "나룻배가 띄워지면 큰 구경거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김 씨는 정암버스정류소를 운영하면서 낙동강홍수통제소의 구 정암교 수위 체크를 맡고 있었다.
'표가 좀 팔리느냐?'고 묻자 김 씨는 "요새 누가 버스를 타나? 담배값도 안돼. 그래도 문은 안닫을거야. 요것이 내 일이니까" 한다. 눈가 가득 미소를 피우며 솥바위를 바라보는 그에게서 무쇠솥의 뜨듯한 기운이 번져왔다. 정류소는 현대판 나루가 아닌가…. 그가 바로 '나루'일 거라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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