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무겁다. 한쪽으로 쓸린다. 이고 지고 어디를 가시나. 지게를 진 사람, 연장을 든 일꾼, 상투 틀고 탕건 쓴 양반, 머리에 수건 두른 여인네. 모두 카메라를 의식한 표정들. 까까머리 아이의 천진한 눈빛, 배고픔을 노려보는 듯. 가운데 앉은 이는 퉁소를 부시나 피리를 부시나. 뱃전의 장정은 돌아앉아 강물을 보고, 사공은 어깨 빠져라 노를 젓는다. 밀양강(남천강) 푸른 물에 영남루와 능수버들이 두둥실. 옆의 빈 배는 누굴 태우려나…. 1910년대의 수묵담채 같은 사진 한 장. 조선시대 끝자락이 잡힐듯 말듯, 불러도 대답없는 나룻배.
아스라한 흑백의 대비가 추억의 누선을 건드린다. 100여년 전 영남루엔 사람이 드물구나. 영남루 좌우의 능파각과 침류각, 오른쪽에 정좌한 천진궁은 옛 자리 그대로다. 휘영청 흘러내린 누각의 처마선에 달빛이 내려앉으면 아름드리 소나무에 두견새 울었으리. 한 수 읊을거나. 누각 처마 끝에서 바라보면 한스럽게 굽이치는 밀양강. 인적없는 삼문동, 처마를 맞댄 번잡한 시가. 식민의 시간을 지나는 문화여 풍류여.
저건, 가솔린 자동차. 운전대 잡은 이는 러시아 신사인가, 일본군인가. 멀찌감치서 걸어오는 사람들, 한복에 중절모, 코트에 털모자 쓴 이들. 강 건너편의 산뜻한 일식 가옥들. 식민의 땅에 세워진 근대의 자취, 조선의 눈물들. 배다리(舟橋 또는 浮橋). 일렬 횡대로 도열한 배가 열대여섯 척. 난간 끝에 붙은 이름 '南川橋'. 밟고 지나가면 출렁거릴듯 낭창거릴듯 슬픈 역사. 흘러간 밀양강의 어제.
● 배다리와 나루터
밀양시 단장면의 진나루를 설명하는 손흥수 씨. 그는 "제철 유적 등을 볼때 1500여년 전부터 나루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창희 기자
밀양은 물의 도시다. 밀양 시내로 들어가려면 길손은 먼저 밀양강을 건너야 한다. 지금의 삼문동은 밀양강 물굽이가 낳은 강 속 섬. 100여년 전 삼문동은 강변 늪지대였다. 1910년 이전까지 나룻배가 밀양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영남루 아래의 큰 포구나무에 배가 묶였고 주변 바위들이 자연 나루 역할을 했다.
일제는 교통 요충지인 밀양을 중시했다. 나룻배가 답답했던지, 1910년대 들어 밀양강에 작전 펴듯 배다리를 놓았다. 배다리는 일제의 기술력과 자본력을 과시하면서 놀라운 풍경을 연출했다. 밀양강의 나룻배들은 하루아침에 배다리 받침으로 들어갔다.
"배다리가 놓인 곳이 밀양읍성의 남문 선착장 자리예요. 영남루에서 아래쪽으로 약 50m쯤 떨어진 지점이죠. 이곳을 지나면 시장통 도로가 나오고 지금의 내일동 사무소까지 연결됩니다. 이 길이 당시엔 간선로였어요. 내일동 사무소 일대에 밀양읍성 관아가 있었죠."(향토사학자 손정태 씨)
"이 배다리가 밀양 교량사의 출발입니다. 이것이 1935년 남천교로 바뀌고 1995년 대대적으로 개수되어 밀양교가 되었어요. 나이 든 사람들은 밀양교 하면 잘 모르고 배다리라고 해야 쉽게 알아 들어요." (손기현 밀양문화원장)
배다리 이전 영남루 앞엔 나룻배가 다녔다. 이 사실은 옛 사진이 증명한다. 그런데 나루 이름이 아리송하다. 문헌자료는 물론 구전으로도 전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손기현(73) 밀양문화원장은 "나루가 있었을텐데,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고, 손정태(60) 씨는 "여기선 응천강이라 부르니 응천나루가 아닐까 추측한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밀양시에 물어봐도 "나룻배가 다녔던 것은 분명한데 이름은 글쎄"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작은 나루라도 이름이 있는데, 조선 3대 명루라는 영남루 앞 나루에 이름이 없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남루의 명성이 하도 높아 그곳 나루터가 가려진 것인가. 큰 나무 그늘 속의 작은 나무 그늘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 영남루의 증언
영남루는 다 보았을 것이다. 영남사(嶺南寺, 8세기 중반 폐사) 자리에 영남루(1365년)가 서고, 임진왜란(1592년) 때 불 타고, 다시 짓고, 또 불 타고, 다시 고쳐 지어(1844년) 오늘에 이른 숨가쁜 곡절들을.
누(樓)의 사방을 트고 마루를 높인 까닭은 사방 팔방을 잘 보기 위한 것. 누가 시를 잘 짓고 누가 잘 놀았는지도 지켜보았을 것이다. 누에 오르면 남천강과 용두목, 마암산이 펼쳐내는 진경을 마주한다. 고려 초 시인 임춘이 영남사 누각을 읊은 이래 이곳은 800여년 간 시정의 무대였다. 1344년께 문인 성원도는 "남방 산수의 정령이 밀양에 모여 이 누각을 껴안고 있는 것 같다"고 찬탄했다. 밀양 출신의 학자 점필재(김종직)는 영남루를 찾았다가 시흥을 주체 못하고 밀양강에 배를 띄웠다.
'난간 밖 맑은 강엔 일백 이랑 구름이요/그림 배 비껴 건너니 강물에 파문이 이네/해 저물자 반쯤 취해 삿대로 배 잡아 바라보니/양안의 푸른 산이 정녕 그림이로구나.'('嶺南樓下泛舟' 전문)
조선 선조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무려 300여개(밀양문화원 발간 '영남루제영시문' 참고)였고, 뱃놀이하며 쓴 범주시(泛舟詩)가 또한 수십 편에 이른다. 영남루는 가히 '시루(詩樓)'였다.
누가 울고 누가 한을 삭였는지도 보았을 것이다. 경술국치(1910년) 후 일본 헌병들은 영남루 앞 천진궁을 그들의 옥사(獄舍)로 바꾸었다. 천진궁은 단군 이래 역대 8왕조의 시조 위패를 봉안한 곳. 단군과 부여,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고왕, 가락국 김수로왕, 고려, 조선 태조왕의 넋이 그 치욕을 감내했다. 천진궁은 그 치욕의 길을 지나왔다.
영남루는 밀양의 영욕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었고, 그 자체로 장엄한 '나루'였던 셈이다.
● 단장천의 진나루
밀양의 나루 이야기를 좇던 중 진나루의 존재를 알았다. 진나루는 밀양시 단장면 구미리에 있는 단장천의 옛 나루. 밀양에서 상류로 20여리 떨어진 곳이다. 밀양문화원 측의 소개로 만난 향토사학자 손흥수(64) 씨는 진나루의 역사를 훤히 꿰고 있었다.
"단장면 사촌~금곡을 연결하는 나루였어요. '지너리 삐알'(진나루 언덕)이라고도 했지. 아직도 그렇게 불러요. 구미리 마을회관 앞에 소나무가 많았는데 그곳이 배 묶던 자리라고 해요. 지금은 안법천이라 부르는데 옛날엔 여기가 단장천의 본류였어요. 70여년 전엔 이 물길로 소금배와 젓배가 올라왔대요. 그 배가 밀양 가서 영남루 한 번 쳐다 보고 낙동강으로 내려갔겠지."
손 씨는 이 이야기를 선대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다고 했다. '무슨 증거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증거가 있지. 이곳에 1500년 전부터 나루가 있었다지 않소"라며 사촌 유적 이야기를 꺼냈다. 단장면 구미리 앞의 사촌마을은 몇년 전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삼국시대 제련로 송풍관 노벽 조각 등 제철 유물을 집중 발굴한 곳이다. 6세기께의 제철 유적이었다. 이 유적의 존재를 학계에 알린 것도 손 씨 였다고 한다.
"이곳의 금곡(金谷·쇠골)과 똥뫼(쇠똥산)라는 지명이 야철지 흔적이죠. 얼마 전엔 기와굴(요지)도 찾았는데 발굴이 안된 채 묻어버렸어. 야철지와 제련시설, 기와굴이 그냥 있나요. 당연히 운송 수로가 있었지. 그게 진나루였던 겁니다. 지금은 물길이 바뀌어 제기능을 못하게 됐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밀양의 나루사는 놀랍게도 1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영남루 앞의 나루가 명함을 못내밀 처지였던 것이다. 손 씨는 "기회가 된다면 단장천 진나루에서 밀양강의 영남루, 삼랑진의 낙동강 합수머리까지 이어지는 옛 뱃길을 답사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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