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외줄같은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의 외나무다리. 길이 80여m에 폭이 한뼘 정도지만, 주민들은 나무 한짐을 지고도 자박자박 잘도 걸어다닌다. 박창희 기자
외나무다리는 외롭다. 사람이 건너가도 한 명이고 달빛이 내려앉아도 한 뼘이다. 그래서 임이 생각나는지 모른다. 복사꽃 능금꽃 그늘에 어리는 눈썹달같은 임이. 그런 눈썹달을 닮은 어여쁜 임이 있을테다. 지금은 싸늘한 별빛 속에 숨어 들었을지라도. 아무래도 좋다. 떠오르는 것이 추억이고 삶의 너끈함이라면.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 내성천(乃城川)에는 삶의 외줄같은 외나무다리가 있다. 이 다리는 초겨울에 태어나 봄이 되면 죽는다. 죽고 살고는 자연이 결정한다. 내성천에 눈석임물이 섞이고 강물이 불어나면 외나무다리는 발붙일 곳을 잃는다. 강물이 줄어 유순해지는 초겨울이 되면 주민들은 다시 어기영차 힘을 합쳐 외나무다리를 놓는다. '뗐다-놓았다' 하는 것이 번거롭지만, 목숨같은 농사가 거기 매달려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 묵은 여울 사람들
경북 북중부의 오지인 예천 신월마을은 '묵은 여울'로도 불린다. 물살이 빠르고 옛날 소금을 싣고 온 배가 마을에서 하루 이틀 묵어간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내성천(106km )은 경북 중북부를 관통하는 낙동강의 제1지류다. 소금배가 다니던 시절엔 동네 앞에 나룻배도 있었다고 한다. 묵은 여울 이장 권상기(63) 씨는 "외나무다리를 놓을 수 없는 여름철엔 나룻배가 다녔다"면서 "10여년 전까지 3대가 있었고, 그 중 한 대를 방죽에 끌어올려 놓았는데 저절로 썩어버렸어"라고 말했다.
묵은 여울엔 45가구 100여명이 살고 있고, 강 건너 논밭이 3만 평을 웃돈다. 마을 전체 농토의 3분의 2에 달한다. 주민들은 강을 건너가서 벼농사나 고추 마늘 고구마 따위를 재배해왔다. 다행히 강이 얕아 다리 없이도 소는 저벅저벅, 사람은 자박자박 조심스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외나무다리가 놓이는 겨울철에 주민들은 나무하기 바빴다. 마을 토박이라는 이상춘(76) 씨는 "한 평생이 지게 인생이었어. 그 놈의 나무 징허게 했지"라며 나무와의 질긴 인연을 떠올린다.
"저 강 건너에 호(오)골과 신(잉)골이 있는데, 한창 나무를 할땐 산에 온통 사람이었어. 우리는 오전에 지게로 한 짐, 오후에 한 짐씩 해 날랐어. 한창 할땐 밥 싸들고 가서 하고 저녁 늦게서야 돌아왔구만. 십리고 십오리고 저 멀리까지도 갔어. "
나무하고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외나무다리가 기다렸다. 한짐을 가득 이고 지고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발을 잘못 디뎌 강물에 꼬꾸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강물이 얕아 사고로 이어지진 않지만, 나무고 옷이고 다 버리는 꼴이 되면서 주위에선 박장대소가 터졌다. 그렇게 울고 웃으면서 주민들은 시린 겨울날을 보냈다.
● 추억 상품으로 부상
지난해 12월 외나무다리 설치 때의 모습.
'놓고-떼기'를 반복하던 묵은 여울의 외나무다리는 1990년대 초반 농가에 기름보일러가 보급되면서 추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데 경제난에다 고유가 사태가 겹치면서 주민들은 다시 땔감에 눈을 돌렸다. 땔감을 하자니 외나무다리가 필요했다. 지난 2004년 말 묵은 여울 주민들은 한동안 잊었던 외나무다리를 다시 놓았다. 고유가가 추억의 다리를 되살린 것이다. 이곳의 외나무다리는 전체 길이가 80여m, 폭이 한뼘 정도다. 하천 변의 미루나무나 인근 야산의 적송을 베어와 세로로 쪼갠 뒤 대충대충 다듬어 두드려 맞추었다. 우둘투둘한 표면에 세로로 길게 흘러간 나이테가 마치 농부의 심줄 같다.
"처음 만들 땐 한 사나흘 걸렸는데, 이젠 요령이 생겨 하루나 이틀만에 뚝딱 놓아요. 모두 우리가 베고 찍어내고 다듬고 박고 끼우고 하지요. 땔감을 하려고 만들어 놨더니 매스컴이 주목하고 외지인들이 많이 찾아와요. 아, 이거 추억상품이 되겠다는 생각도 듭디다."(이장 권상기 씨)
이 다리를 처음 본 사람은 누구나 아련한 향수에 젖게 되고 한번 걸어보고 싶다는 유혹에 빠진다. 그런데 걷는 게 장난이 아니다. 몇 발자국 안옮겨 외나무가 떨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평행봉 위를 걷는 것보다 더 어렵다. 건들 바람이라도 불면 자빠질 것 같다.
놀라운 것은, 묵은 여울의 주민 대부분은 나무를 한 짐 지고도 자박자박 외나무다리를 잘도 지나 다닌다는 사실. 물론 작대기는 짚는다. 하지만 작대기는 균형을 잡아주는 도구에 불과할 뿐, 물에 빠지는 사람을 구해주진 못한다.
● 건너가고 오는 것들
묵은 여울의 외나무다리는 믿음의 가교다. 다리 중간에서 사람이 마주쳐도 "먼저 가이소…"하면 된다. '원수'를 보내주라고 다리 중간에 비킴다리 두 곳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른을, 아우는 형님을, 남자는 여자를 먼저 건너게 하는 것은 이 마을의 불문율이다. 외지인에겐 작대기를 빌려준다. 이게 추억상품이 된 것은 욕심없이 살아온 이들에 대한 자연의 보너스가 아닐까.
묵은 여울에선 삶이, 일상이 아주 천천히 흐른다. 나무 한 짐을 지고 느릿느릿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노래 한 자락은 저절로 흘러나올 것 같다.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 다리….'(최무룡의 '외나무다리' 중)
묵은 여울에는 그 흔한 구멍가게조차 하나 없다. 대신 첩첩산골 아니면 구경하기 어려운 일소가 두 마리나 있다. 농촌이라도 비육우 아니면 번식우 뿐인 현실에서, 일소가 있다는 것은 농경사회의 기초 질서가 유지된다는 말이다. 소가 음식이 아니라 가족인 곳. 등골 빠져라 쟁기를 끌고 사래 긴 밭 갈고 돌아오면 주인이 뜨듯한 쇠죽을 쑤어 주고 쇠등을 긁어주는 그런 마을이 있다는 것은 눈물겨운 희망이다.
두 집에 한 집 꼴로 아궁이에 불을 때며 사는 묵은 여울이 오래 눈에 어른거린다. 겨울이 완연한 봄을 부를 때까지, 그곳 주민들은 도란도란 외나무다리를 건너 나무를 계속 할 것이다. 머지않아 복사꽃 능금꽃이 피어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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