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느림과 빠름, 만남과 떠남에 대한 명상이다. 20세기를 숨가쁘게 건너오면서 우리가 잃은 것과 얻은 것, 붙잡은 것과 놓쳐버린 것을 짚어보려 한다. 생각하면 많은 것들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흘러갔다. 단순한 소통을 문화라 하고 질주를 문명이라 우기진 않았던가. 나는 빠름 속에서 느림의 급소를 포착하고자 한다. 이것을 이야기할 상징적이고 구체적인 장소가 나루와 다리이다. 다리에 새겨진 시간과 추억을 안주로 어느 나루터 주막에서 술 한잔 걸치고 싶다. 부디 나의 나룻배에 당신은 행인이 되시길…. 잠자는 감성을 깨워 떠나는 여행의 아침은 설렌다.
● 마지막사공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나루
최보식(65) 씨는 낙동강 중류 대암나루(대구시 달성군 구지면)의 현역 뱃사공이다. 요즘도 그는 나룻배(발동기가 달린 철선)를 부리며 강변 주민들을 실어 나른다. 40여년 간 끈덕지게 황소처럼 나루 일을 해왔다. 꿈적일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일하고도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대암나루 코밑에 건설되고 있는 우곡교(고령군 우곡면~달성군 구지면 연결)가 조만간 개통되면 그의 나룻배는 할 일이 없어진다. 우곡교 개통식이 그의 뱃사공 졸업날이다. 우곡교 개통식엔 내로라는 분들이 참석하겠지만, 최 씨의 뱃사공 졸업식엔 그 혼자 뿐일 지 모른다.
이창학(54) 씨는 안동 하회나루의 뱃사공이다. 최 씨와는 달리, 그는 관광용 나룻배를 부린다. 배는 무동력이며 삿대로 움직인다. 낙동강의 하회 뱃나들(나루)에서 강 건너 부용대까지 오가는데, 3년 새 전국적인 명물이 되었다. 4월 초 나룻배가 깨어나 관광객을 맞으면 하회의 봄은 터질듯 부풀어 오를 것이다. 다행히 하회마을엔 아직 다리가 없다.
하지만 하회 조금 아래인 광덕 잠수교 위에 무쇠같은 다리가 건설되고 있다. 부용대로 이어지는 자동차 길을 새로 놓는 것인데, 새 다리가 놓이고 나서도 하회 나룻배가 온존할 지 궁금하다.
최 씨와 이 씨는 아마도 우리 시대 마지막 뱃사공일테다. 누가 사공의 노래를 불러줄 것인가. 춘삼월이지만 나루에 부는 바람이 아직은 차다.
● 나루위의 질주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의 외나무다리.
다리는 대개 나루 위에 놓여진다. 다리가 놓이면 나루는 속절없이 폐쇄된다. 나루는 다리를 염려하지만, 다리는 나루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루는 머물고 다리는 떠난다.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은 바로 나루의 노래가 아닌가.
나루의 시대가 가고, 물밀듯이 도래한 다리의 시대. 소통에 따른 변화는 분초를 다투며 찾아온다. 다리는 소통과 질주를 전제로 태어났다. 많은 다리들은 질주 본능에 충실한 듯하다. 다리 아래에 무엇이 흐르는 지, 어떤 풍경이 펼쳐지는 지, 누가 웃고 우는 지 따위엔 관심이 없다. 가자, 바쁘다. 시간이 돈이다. 효율이다. 달려, 달려라구…. 빵빵, 야! 빨리 안가고 뭐해?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달려야 한다. 달려야 생이 펴이느니.
경북 예천군 의성포로 들어가는 철다리,
아, 달려야 생이 펴인다니…. 눈부신 질주를 멈추고 뒤돌아보면 나루가 가물가물 손짓한다.
우리 어머니, 그 어머니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어머니가 건너왔던 나루 말이다. 나루의 시대에는 모든 공간이 열려 있었다. 산과 강, 들로 이어지는 길이 열렸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이쪽과 저쪽, 시간과 공간이 서로 통성명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들의 가슴마다에는 정이 넘쳐 흘렀다. 산하엔 야성이 꿈틀거렸고 야생이 춤을 추었다. 그곳엔 인간이 어떻게 간섭할 수 없는 '발효되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다리는 무정하다. 애초부터 정이 없었던 게 아니라, 편리에 취한 나머지 애써 무시하고 모른 척 했다. 다리엔 기다림이 없다. 아무도 애써 기다려주지 않는다. 슬픈 일이다. 우리는 너무 빨리, 후회도 없이 다리의 속도에 적응한 것은 아닌가.
다리의 시대로 이동하면서 많은 공간이 닫혀져 버렸다. 사람들은 질주에 빠진 나머지 풍경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다. 다리에서는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만을 볼 따름이다.
주막의 질펀한 여유와 나루의 느리고 순한 원경은 한갓 기억이 되려 한다. 문명의 첨병처럼 20세기 교량공학이 빠르게 건너간 자리에 나루의 눈물이 있다.
● 다리의 시간
경남 마산시 구산면 저도 연륙교(일명 콰이강의 다리),
나루를 생각하며 다리의 시간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옛 다리들은 민중사의 숨결이자 문화사의 자취이다. 생각하는 다리들도 점차 늘어난다. 반가운 일이다.
경북 영주시 수도면 무섬마을의 내성천에는 삶의 외줄같은 긴 외나무다리가 걸려 있다. 시멘트 다리가 있는데도 주민들이 일부러 외나무다리를 놓았다. 왜? 옛 것, 옛 향기가 그리워서라고 한다. 경북 예천군 보문면 신월1리에는 지게꾼들이 나무 하러 다니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나무 한짐 해서 널빤지다리를 건너면 연탄 몇 장이 절약된다고 한다.
경남 남지에는 70년 된 철교(남지교)가 있다. 새 다리를 가설하면서 없어질 운명이었으나 주민들의 보존 열망이 문화재청을 움직여 근대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받은 다리이다. 남지교에는 일제가 남긴 근대화의 흔적과 한국전의 상처와 교훈, 남지 주민들의 애틋한 시간과 추억이 새겨져 있다. 남지 사람들에게 남지교는 이미 삶의 일부로 편입된 환경이다.
마산시 구산면 구복리의 작은 섬 저도에는 그림같은 연륙교 두 개가 놓여 있다. 옛 다리와 새 다리이다. 옛 다리는 흔히 '콰이강의 다리'라 불리면서 많은 연인들이 찾아온다. 손잡고 걸으면 사랑이 이뤄진단다. 3년 전 이곳에 무지개 형태의 아치교가 새로 놓이면서 풍경이 바뀌었다. 이 두 개의 다리는 과잉소통과 인간의 욕망 같은 생각거리를 가져다준다. 사람들이 찾아드는 것은 볼거리와 생각거리가 있기 때문일게다.
● 진정한 소통과 만남
오늘의 다리들은 생활의 이기나 편리를 넘어 문명의 기호로 자리잡고 있다. 광안대교나 창선-삼천포대교가 말해주듯, 큰 다리 하나가 도시의 표정이 되고 랜드마크가 된다. 변화는 숨가쁘게 찾아오고 지나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잃는 것과 얻는 것을 동시에 본다.
다리에 잠시 차를 세우고 나루로 내려가 보자. 나루에 가면 자연 품속의 인간, 때묻지 않은 문명과 문화의 진솔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3월의 고운 햇살 속에서 나는 아팠다. 오염된 땅, 더러워진 물, 잘려나간 산허리, 삭막해진 세태 따위를 온 몸으로 마주치고 뒤돌아보니 나루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옆엔 너무도 당연한 듯이 다리가 씽씽 달린다.
가수 이동원은 '세월에 다리를 놓고' 사랑이 변치 않기를 바랐지만, 난 나루에 놓인 다리가 더 이상 무정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어떤가. '질주하는 것은 바보다'라고. 하긴 볼 것을 못보고 내빼버리니 바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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