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곡의 세월 흐르는 강위로 다시 희망이 가로지르고… "일제 잔재라고 말도 많지만 우리 피땀서린 엄연한 삶의 일부" 낙동강 민초들 애환과 추억의 상징 나루터 옛 명성은 역사속 기록만 신·구 철교, 상생으로 나아가야
남지철교는 곧 신·구 임무교대를 한다. 앞쪽의 하늘색 철교가 일제때 건설된 것이고, 그 뒤편 주황색의 우람한 철교가 오는 6월 개통되는 신 철교이다. 박창희 기자
●먼 데서 온 손님
2006년 7월16일, 창녕 남지철교에 귀한 손님 두 분이 찾아왔다. 일본인 나가지마(中島) 여사와 그의 장성한 아들이었다. 60대 중반의 이 여인은 감회에 젖어 철교를 살폈다. 녹슨 철골을 손으로 만지고 리벳 이음까지 관찰하는 모습은 여느 관광객과 달랐다. 이들은 놀랍게도, 일제시대 남지철교와 의령 정암교를 설계한 이야마(井山安藏) 씨의 딸과 손자였다.
6·25전쟁 직후 폭파된 남지철교를 배경으로 여학생들이 사진을 찍었다. 교각 끝에 한 사람이 강을 보고 서 있다. 이 사진은 지난해 철교사진전 때 공개됐다. 사진제공=남지철교보존대책위원회
당시 이들을 안내한 남지철교보존대책위원회(이하 남지철교보존회) 김부열(45) 위원장에 따르면, 나가지마 여사는 아버지의 생전 자취를 더듬기 위해 방한한 것이었다. 이들은 남지철교와 함께 의령 정암교도 찾았으며, 70여년 전의 자료까지 가지고 왔다고 한다.
기이한 해후였다. 우리의 슬픈 역사가 그들에겐 또다른 추억으로 숙성돼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들에게도 아픈 가족사가 있었다.
"남지철교를 설계한 이야마 씨는 33살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해요. 그 분의 부인, 즉 찾아오신 일본 손님의 어머니(현재 94세라고 함)는 그때 홀로 되었고 세 자녀를 키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함께 방문하려고 했는데 노령과 건강을 걱정하여 따님과 손자만 방한하게 되었다는군요. 그러니까 이들의 방한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자 연로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었던 것 같아요."(김부열 위원장)
이 사연을 전한 김 위원장은 "그때 만남이 계기가 되어 가끔씩 이메일을 주고 받고 있다"면서 남지철교가 현해탄을 건너 민간외교까지 담당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첨단 공법의 구조
남지 구 철교의 리벳 접합(위)과 신 철교의 볼트-너트 접합이 대비된다.
남지철교는 민족사의 굴곡과 지역민의 애환이 서린 다리이다. 일제때 건설되어 6·25전쟁때 두동강이 났고, 얼마전엔 철거될 운명이었다가 가까스로 등록문화재가 된 이력은 그대로 현대사의 단면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철교를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 자료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남지철교 보존운동이 펼쳐지면서 뜻밖의 진귀한 기록과 자료가 확보되었다. 지난 2004년 남지철교 철거 논의가 불거지던 시점, 동아대 강영조(도시계획 조경학부) 교수는 일본 도쿄대를 통해 우연히 남지철교의 설계도와 공사 보고가 담긴 문건을 찾아냈다. 1932년 12월 남지철교 준공을 앞두고 작성된 '공사 휘보(彙報) 제18권'이 그것인데, 실로 70여년 만의 자료 발굴이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남지철교는 1931년 9월에 착공, 1933년 3월에 준공되었다. 시공사는 오사카 횡하교량제작소(大阪橫河橋梁製作所). 가설 목적은 '남지는 한반도 주요 도시인 마산~대구를 잇는 교통요지에 있고, 종래 도선 연락을 하였지만 위험하고 불편해 궁민구제사업으로 철교를 세운다'고 돼 있다. 철교의 길이는 390m, 폭은 6m. 공사비는 26만6000원('엔'의 오기인듯)이었다. 공사 과정도 드러난다. '콘크리트 사용 총량은 2822㎥. 콘크리트 작업은 기계 대신 노임이 싸므로 손으로 반죽함. 1932년 10월 현재 동원된 인부는 2만3000명임.' 인부는 대부분 조선인일 것이었다.
강영조 교수는 "남지철교에 적용된 게르버식 연속 트러스는 당시로선 첨단 공법으로, 교량 기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ㅁ자 교각은 육상선수의 다리처럼 군살 하나 없고, 교량 진입부의 경사 단주(端柱)는 시치미를 뚝 뗀 미인의 맨얼굴을 보는 듯하다. 트러스를 이루는 가지런한 수직재(垂直材)와 사재(斜材), 상판 아래의 격자구조는 '뼈속에 힘이 있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주요 부재에는 요즘처럼 볼트-너트를 쓴 게 아니라, 일일이 리벳으로 용접해 붙였다. 70여년을 버티게 한 원천이 첨단 공법과 수작업에 있었던 것이다.
●추억과 향수
남지철교 설계자의 딸인 나가지마(왼쪽) 여사와 그의 아들이 지난해 남지를 찾았다.
남지철교는 최소한 남지 주민들에게 삶의 일부로 편입된 환경이다. 철교는 놀이터이자 데이트 코스였고 다른 지역에서 부러워하는 자랑거리였다. 아이들은 철교 난간을 타고 올라가 높다란 트러스 위를 깨금발로 건너뛰곤 했다. 사진을 찍어도 철교가 배경이 되었고, 외지에서 돌아와도 철교가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
하지만 일제 잔재라는 꼬리표는 추억을 끝없이 괴롭혔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나이든 어른들의 생각은 달랐다. 비록 일본사람이 설계하고 공사를 주도했어도, 현장에서 피땀 흘리며 다리를 세운 주역은 조선인들이었다는 것. 따라서 '철교는 우리 것'이라는 논리였다. 철교 매점을 운영하는 남지 토박이 황규익(69) 씨는 "철교가 폭파된 직후 나룻배가 물자를 옮기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면서 "부서진 다리를 땜질하며 복구한 사람도 모두 남지사람일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에 의한 근대화의 산물인 철교는, 이처럼 복잡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며 낙동강을 건너고 있었다.
낙동강이 남강을 끌어안아 터를 넓히는 남지에는 일찍이 나루가 흥했다. 철교에서 아래로 500여m 떨어진 강가엔 웃개나루가 있었다. 웃개의 '개(浦)'는 물가를 뜻한다. '동국여지승람' 영산현 조에는 웃개가 칠원현의 우질포(于叱浦) 또는 상포(上浦)로 나온다. 이후 남지 쪽에선 영산 웃개, 강 건너 함안쪽에선 칠원 웃개라 불렸다. 웃개는 땅과 낯을 가리지 않았다. 나루는 두 개인데 이름이 하나라는 것은 제대로 통했다는 의미이다.
18세기에 발간된 '해동지도'에는 남지읍 일대가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에 이르는 다섯 번째 대로로서, 마방과 여각 객주집이 즐비한 수운의 중심지라고 소개돼 있다. 또 17세기초 함안의 선비 조임도(趙任道)가 정리한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에는 남지 건너편인 함안 도흥나루의 흥성했던 한 시절이 그려져 있다.
남지의 나루 전통이 남지철교를 서게 한 바탕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철교의 이면에 나루가 흐르고 있음이다. 아쉽게도 사람들은 그 나루를 다 떠내려 보내고 말았다.
●상생의 나루를 찾아
철교는 이제 두 개로 흐른다. 구 철교 옆에 신 철교가 나란히 놓이고 있다. 신 철교는 길이 745m, 폭 13m으로 규모가 구 철교의 배다. 주황색의 늠름한 트러스 철골 구조는 구 철교를 압도한다.
그런데 왠지 낯설고 허전하다. 이런 부조화는 애초 구 철교의 철거를 전제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앞뒤 돌아보지 않은 질주 행정의 귀결같아 씁쓰레하다.
어쨌든 이제 상생을 말해야 할 때이다. 구 철교와 신 철교는 20세기와 21세기의 조우, 과거와 현재의 공존이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공존의 방법론 한 가지는 잃어버린 나루를 되찾는 것이다. 그건 별로 어렵지 않다. 구 철교 자체가 나루가 될수 있기 때문이다. 철교의 평면 공간만 자그마치 730여평이다. 여기에다 낙동강의 하늘과 물, 입체적 트러스와 난간을 활용한다면 살아있는 문화공간이 될 수 있다. 이미 세차례 열린 철교 사진전은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 남지철교가 지닌 역사성을 씨줄로, 문화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날줄로 엮어 '쌍끌이'를 한다면 우리는 나루없는 시대에 아주 괜찮은 나루 하나를 가질 수 있다.
남지의 낙동강 둔치에선 내달 21~29일 유채꽃 축제가 열린다. 꽃밭이 7만 평으로 전국 최대라고 한다. 그 곳에 시방 유채꽃이, 모든 싹눈과 꽃눈, 잎눈이 어둠을 뚫고 나오려고 아우성이다. 신·구 철교의 임무교대를 보려고! 그 장관을 꼭 봐야겠다.
●철교는 우리네 '어머니'
'남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대표인 박태명(오른쪽) 씨와 김부열 씨.
남지철교는 2004년 2월 철거 선고를 받았다. 교량안전등급 D급. 차량통행이 금지됐다. 신 철교 가설 논의가 구체화되면서 구 철교는 철거될 운명이었다.
"뭐라꼬? 철교를 없앤다꼬?" 중년 이상의 남지 주민들이 발끈했다. 이들은 철교 없는 남지를 상상할 수 없었다. 철교 살리기 운동이 시작됐다. 깃발을 든 이는 김부열(45·마산 의신여중 교사) 씨와 이상주(45) 씨 등 남지의 중년 세대들. 남지철교보존비상대책위가 조직됐고, 온-오프라인을 통한 철거 반대운동이 전개됐다. 대책위는 철교 사진전과 천막극장 등을 마련, 주민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남지철교는 어머니입니다…'. 남지의 출향인들이 가세하고, 언론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 대책위가 생각해낸 것은 남지철교의 문화재 지정. 지역사료를 모으고 당위성을 적극 홍보한 끝에 문화재청의 실사가 이뤄지고, 마침내 2004년 12월말 '등록 문화재 145호'로 지정되었다.
남지철교의 문화재 지정은 지역문화운동의 개가였다. 운동 과정에서 지역사료가 발굴되고 주민들의 애향심과 문화의식이 고취된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김부열 씨는 취재소식을 듣고 마산에서 버스를 타고 달려왔다. '문화재 지킴이'로 문화재청으로부터 우수상까지 받은 바 있는 김씨는 "우리의 무기는 상상력과 순수성이다. 즐거운 도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의욕이 넘쳐 있었다.
대책위는 얼마 전 '남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새 조직을 만들었다. 철교 뿐만아니라 지역문제 전반을 논의하는 모임으로 확대 개편된 것. 이 모임의 공동대표인 박태명(58·남지동물병원 원장) 씨는 "이제 지평을 넓혀 60만평에 이르는 남지의 낙동강 둔치를 문화와 환경 레저가 어우러지는 생명 공간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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