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뱃길, 불꺼진 풍경 건너…등대가 추억만 밀고 옵니다
영산강! 하고 불러야 한다. '!'하나쯤 붙여야 남도의 비릿한 갯내와 숨죽인 슬픔, 혹은 시시껄렁한 얘기가 터져나온다. 그래야 얘기 속에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 얘기가 삶의 물비늘로 튄다.
영산강은 누님이 생각나는 강이다. 멸치젓 향기를 품은 억척 누님. 아무리 힘든 일도 제 물굽이에 받아 넘기시던 누님. 눈물마저 미소이던 강물, 목 메어 부르는 영산강, 부르다 목 멘 영산포.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읍내의 바람이 다디달 때/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나해철의 시 '영산포1'를 들고 찾아간 전남 나주의 영산포. 영산강은 간밤의 장대비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쿨렁쿨렁 흐르고 있었다.
①1950년 초 나주 영산포의 분주한 한때를 보여준다. 목포에서 120리 떨어진 영산포는 영산강의 수운 요지였다. 강변에 일제때 세워진 등대가 보인다. 사진=나주시 제공 |
영산포 등대는 말이 없었다. 강가에 우뚝 선 채 무연히 강물만 지켜본다. 등명기는 점멸을 멈췄고, 대신 현대식 컬러 조명등이 들어 앉았다. 저녁이 되면 등대 주변의 투광기 6대가 등대를 비춘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던 등대가 주변 빛의 도움으로 자기 존재를 알리고 있다.
툭 하면 차고 넘치는 물, 조금만 가물어도 졸아버리는 강. 등대 몸통에 새겨진 수위 표지가 강의 변덕을 조용히 설명한다. 선창의 길과 집들은 일찌감치 높다란 콘크리트 방벽을 쳐놓고 뒤로 물러 앉았다. 강가에는 등대만 남았다. 눈길을 주지 않으면 등대는 웃지도, 말하지도 않는다.
영산포에 등대가 들어선 것은 1915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된 그 다음 해다. 일제가 주목한 것은 곡창 나주평야와 영산강 수로였다. 나주 영산포는 영산강의 수운 요지로 수탈 창구로 적격이었다. 영산포 등대는 말하자면 호남 착취의 길잡이 노릇을 한 셈이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영산포 등대는 근·현대 역사, 그 이상의 아련한 추억이 되어 있었다.
"영산포가 전부 변해 부렀지만 저 한놈만은 용허게 옛 모습 그대로제. 저 등대만 보문 선창에 배 들어오던 시절이 생각 나. 1970년대꺼정 이 곳에 배가 무지 많이 드나들었제. 괴기배가 많았지만 신안 영광 염전에서 소금을 실어 나르는 배도 겁나 부렀어. 그 많은 배들이 저 등대 보고 댕겼응께 웬만한 바다 등대보다 저게 더 중한 역할을 한 셈이여." 영산포에 배가 들던 시절 홍어 중개업을 했다는 손석용(69·전남 나주시 영산동) 씨의 얘기다.
영산포에서 목포까지는 뱃길로 120여 리. 나주 영암 해남 목포 신안 사람들은 이 뱃길을 이용해 장사를 하며 살았다. 영산포는 고려시대부터 나주 해상 세력의 중심지였다. 고려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누르고, 나주 오 씨(장화왕후)를 만나 건국의 발판을 마련한 곳이 나주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보관하는 영산창이 있었는데, '경국대전'에 당시 선박 53척이 일시에 도열해 있었다고 언급할 정도로 큰 포구였다.
손 씨는 "저 등대 불이 꺼져분께 영산포도 같이 죽어부렀제. 뭣보담도 강물이 맑아져야 혀"라며 수질 오염을 걱정했다.
영산포 등대는 1978년 영산강 뱃길이 끊기면서 불이 꺼졌다가 최근 다시 불이 켜졌다. 나주시는 이 등대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궁리를 하고 있다.
②오늘날의 영산포 등대. 옛 선창 자리에 홍수를 막기 위한 콘크리트 방벽이 쳐졌다. 방벽 뒤로는 홍어가게가 즐비하고, 군데군데 일제시대 건축물이 남아 있다. |
영산포에는 일찍이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금강진(錦江津:영산포의 옛 이름)에 영산교(榮山橋)가 놓여 1년에 한 번씩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간소한 나무다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때인 1922년에는 영산포 등대 옆에 '영산구교'라는 나무다리가 있었다. 사진이 남아 있는데, 오늘날 섶다리처럼 나무를 A자로 촘촘히 세워 영산강을 가로지른 모습이다.
등대가 세워지기 전인 1914년 배가 오면 다리를 들어올려 통행할 수 있도록 하는 개폐식 목교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개폐식 다리는 신의주와 부산 영도다리 두 곳에만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리학자인 김경수(전남대 사대부고 교사) 씨가 영산포의 개폐식 다리 존재를 연구 결과 밝혀냈다.
'영산강 삼백 오십리'(향지사)의 저자이기도 한 김 씨는 "영산포의 이런저런 다리와 수위 측정을 겸한 등대 등은 일제가 수탈을 위해 영산포를 중시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영산포 등대 주변에는 일제 때의 건축물이 적지 않다. 영산동에는 일제 때 나주의 최대 일본인 지주였던 구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의 저택이 남아 있고,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회사의 문서 창고가 온전하다. 일제시대에 개발된 원정통(元町通) 거리는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이다.
이들 일본인 건축물은 역사 상념에 잠기게 한다. 싫든 좋든 근대 문화유산의 격을 얻고 있으니 없애버리자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일제에 짓밟힌 우리 민중들의 한과 눈물은 기억해둬야 한다. 문순태 씨의 소설 '타오르는 강' 서문에 기억해야 할 이유가 적혀 있다. '…영산강에는 한이 흐르고 있다. 아무런 욕심 없이 '내 땅'을 지키고 살며, 조금 여유가 있으면 술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판소리, 육자배기 한바탕 꺾는 것이 꿈의 전부인 이들은 끊임없이 빼앗기고 짓밟혀왔다. …이들은 '한의 실꾸리'를 감지만 않고 풀었다….'
일제의 질곡을 지나온 영산강은 그후 산업화 과정의 오폐수를 한 몸에 받아냈고, 급기야 1981년 말 길이 4.3㎞, 최대 높이 20m의 하구둑에 막혔다. 이때부터 영산강은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있다.
● 영산강의 당제 풍습
"경상도 쪽에도 당집이 남아 있나요? 나주에 아주 특이한 당집이 하나 있어요. 이를테면 영산강의 용신을 모신 당집이죠. 그런데 참 인간적이에요. 함 가볼랑가요?"
나주문화원 김준혁(46) 사무국장의 얘기에 귀가 번쩍 뜨였다. '당집·당산(堂山)'이란 단어 자체가 생소하게 와닿는 요즘 아닌가. 전래 당집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던 신성한 공간이었으나 거의 대부분 자취가 사라졌다. 김 국장이 안내한 곳은 나주시 제창마을의 별봉산(168m) 자락. 그곳에 '용진단(龍津壇)'이라 불리는 한 칸 짜리 당집이 있었다. 영산강 물줄기와 함께 앙암(仰岩)이란 큰 바위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 앙암 아래에 용신이 산다고 해요. 옛날 왜구들이 노략질을 하려고 영산강 거슬러 오르다가 앙암 바우 밑 소용돌이를 못 이겨 되돌아갔다는 얘기도 있어요. 앙암의 용신을 달래 무사 항해를 기원하던 당집이 용진단이죠."
당집 입구엔 '正禮(정례)'라 적힌 비석이 서 있고 새끼줄이 쳐져 있었다. 당집 안에는 당할아버지의 영정이 걸려 있었는데, 흰 수염이 더부룩한 게 자상한 모습이다. 영정의 진본은 도난당하고 지금의 것은 새로 복원한 것이란다. 당할아버지 떠메 간 '도선생'이 온전했을까 궁금하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당산(당집) 주변에 당산나루 네 그루가 방위별로 포진해 있다는 점. 이른바 지신당인 당할아버지를 모시는(?) 사당산의 당할머니들이라고 한다.
"지신당의 신격은 당산할아버지이고, 사당산의 신격은 당산할머니죠. 사당산의 당산나무는 웃당산, 앞당산, 솔당산, 큰당산이라 불려요. 마을의 동쪽 도로 맞은 편, 마을의 중심부인 마을회관 옆, 서쪽인 미천서원 옆, 그리고 당집 앞에 귀목나무와 팽나무가 서 있죠."(김 사무국장)
당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열흘 자시에 지내며, 지내기 전 모두 몸가짐을 조심하고 정성을 쏟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당집을 관리한다는 김철중(85·나주시 제창리) 씨를 만났다. "왜 힘들게 당제를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조상대대로 지내왔응게 지내지. 지내고 나면 마음이 편허고 일이 잘 된당께."
용진단은 자연에 순응하는 나루터 마을의 전승(傳承)으로, 나루 없는 시대 또 다른 나루의 모습이었다. 나주 제창마을에서만은 당제가 케케묵은 풍습이 아니라 숨쉬는 문화유산이었다.
출처 : 국제신문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본 포스트는 박창희 기자님의 허락하에 게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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