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고운 연인 푸른 물에 몸던질때 못견딜 그리움도 함께 묻었다
'퇴계를 사랑한 여인' 기생 두향의 애틋한 전설이 서린 충북 단양의 장회나루. 강 건너 산 기슭에 두향의 묘(□표시)가 보인다. 박창희 기자 |
"두향아, 얼굴이 어둡구나. 무슨 일이 있는 게냐?"
"아무 일도 아니옵니다."
"허면 내가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그런 것이냐?"
"…."
두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먹을 갈던 벼루와 화선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화선지에 눈물이 스며들었다. 퇴계 선생이 경상도 풍기로 떠난다는 소식은 두향에게 청천벽력이었다. 9개월만의 이별. 견뎌야 한다는 마음과 잊어야 한다는 마음이 맹렬하게 싸웠다. 목숨같은 정을 끊고 어떻게 견딘단 말인가.
● 상사별곡(相思別曲)
퇴계 이황(1501∼1570)이 단양군수로 부임한 것은 1548년이다. 둘째 부인과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퇴계는 두향을 만났다. 두향은 비록 관기(官妓)였으나 거문고와 시서화에 능했고 몸가짐이 반듯해 일찍 퇴계의 눈에 들었다. 두향은 매화를 좋아했고, 퇴계는 그런 두향을 좋아했다. 두향은 해어화(解語花·말을 알아듣는 꽃)였다. 당시 퇴계의 나이는 48살, 두향은 18살이었다. 두 사람은 신분과 세대 차이를 뛰어넘어 연분을 나누었다.
태산 같던 퇴계도 두향 앞에선 인간이었고 남정네였다. 퇴계의 마음도 시리긴 마찬가지였다. 새 임지로 관기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두향의 눈물이 번져난 화선지에 퇴계가 붓을 세웠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死別己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 없네.(生別常惻測)
퇴계는 떠나고 두향은 남았다. 단양과 풍기는 먼 거리가 아니었지만, 만날 수 없는 운명임을 두향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격강천리(隔江千里)라더니…. 떠나는 퇴계의 봇짐 속에는 두향이 마음을 담아 선물한 매화분이 들어 있었다. 퇴계가 떠난 후 두향은 신관 사또에게 자신을 기적(妓籍)에서 삭제해 달라고 청했다. 한 남자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른 남자를 모실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기녀인 까닭에 천대받았던 두향은 자유인이 되었다. 그리고 수절(守節). 단심으로 그리움을 가슴에 재우던 두향은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비련에 목 메이다 남한강 강선대에서 몸을 던진다. 나이 스물 여섯. 철쭉꽃이 난분분하던 어느 봄날의 낙화였다. 여기까지는 '기문총화(記聞叢話)'와 단양 향토지 등에 전해지는 퇴계와 두향의 연애담이다.
● 두향 생각
두향(杜香)의 존재를 부각시킨 이는 소설가 정비석이다. 그가 쓴 '명기열전(名妓列傳)'에는 두향이 풍기로 가는 죽령고개의 먼 발치에서 퇴계를 바라보고 젖은 눈으로 돌아오는 애틋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최근에는 소설가 최인호가 장편 '유림'에 두향 이야기를 운치있게 그려 놓았다.
충북 단양 사람들은 두향을 퇴계의 연인으로 이해하고 끔찍이 챙긴다. 이곳 주민들은 1985년 충주호 조성으로 강선대(충북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인근의 두향묘가 수몰될 처지가 되자, 묘를 그 위쪽으로 이장하고 이듬해부터 두향제를 지내고 있다. 오는 12일 제21회 두향제가 열린다.
두향의 자취를 좇던 중 단성향토문화연구회 서천석(48) 회장을 만났다. 그는 두향이 실존인물임을 강조했다.
-두향의 무덤이 있다지요.
"있지요. 비석도 세워진걸요. '杜香之墓'라고 적혀 있어요."
-벌초도 합니까?
"당연히 하죠. 추석 때면 우리 연구회 회원들이 배를 타고 들어가 벌초를 합니다. 술도 한잔씩 쳐 놓지요."
-두향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단성면 두항리라고 전해져요. 두향의 고향이라서 두항리가 됐을 것으로 봐요. 본시엔 기녀(妓女)가 아니었는데, 5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10살때 어머니마저 사별, 퇴기(退妓)인 수양모 아래에서 자라 13세때 기적에 올랐다고 합니다. 연고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기생인 두향을 챙깁니까?
"수절 기생으로 춘향이 있지만 그는 소설 속 인물입니다. 반면 두향은 실존 인물인데다 내용이 춘향전보다 감동적이잖아요."
두향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따지지 않기로 한다. '낮퇴계'와 달리 '밤퇴계'가 어린 관기와 연애를 하고, '나으리'가 전근하자 수절 종신했다는 이야기는 보기에 따라 아름답다고만 할 수는 없다. 요즘 페미니즘 시각으론 오히려 두향이 바보일 수 있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두향이 따라 죽었다는 결말에선 괜히 심술이 난다. 두향이 죽은 시점도 정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향제는 아름답다. 한갓 관기의 인간해방을 얘기하고, 수절의 넋을 기리며, 지역문화의 한 축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 나루 유전(流轉)
장회나루 선착장 전경. |
장회리는 원래 남한강 나루로 유명했던 곳이다. 장회리 장신일(65) 이장은 "해방될 시점까지 서해안의 소금배가 올라왔고, 뗏목이 엮여져 한강으로 운송되기도 했다"며 "역참에 주막까지 있었으니 번성했다고 봐야지"라고 말한다. 장회리는 수몰되기 전 74가구였는데, 다 흩어지고 지금은 너덧 가구가 남았다. 월악산 국립공원 구역이어서 주민들의 삶이 제약받는 것도 아픔이라고 한다.
나루는 기업처럼 굴러간다. 장회나루에만 유람선이 3척(195인승 1척, 77인승 2척)이며 한해 60여만 명이 이용한다. 수학여행과 효도관광의 필수코스로 자리잡은 지도 오래다. 도선처럼 운행되는 충주호 관광선도 5척(464인승 2척, 123인승 3척) 있다. 도선은 충주나루-월악나루-청풍나루-장회나루-신단양나루(수위 따라 제한 운영)를 오간다. 충주~장회나루를 잇는 뱃길 52㎞는 우리나라 내륙에서 가장 길고 멋진 유람 코스다. 산업화에 밀려 사라졌던 충주 일대 옛 남한강 나루들이 또다른 산업화(충주댐)에 힘입어 되살아난 것은 흥미로운 나루 유전(流轉)이다. 잠자던 나루들이 깨어나 돈을 벌어주고 있다.
● 옥순대교
옥순봉 등 단양팔경을 끼고 들어선 옥순대교. 빨간 색 트러스가 눈부시다. |
옥순대교를 보노라니 상념이 교차한다. 자연과 문명의 잘못된 만남이라고 비판하기엔 현대 교량공학이 너무 빛나고, 교량공학이 자연에 가한 상처를 생각하니 머리가 어찔하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상념이 두향을 불러낸다. 두향은 왜 꽃다운 나이에 남한강에 뛰어 들었던가. 그건 현명한 선택인가. 단양팔경의 절경 속에 첨벙 뛰어든 옥순대교가 저와 같지 않은가.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선택한 '투신'이, 청풍호반을 질주하는 다리와 다르지 않음이다. 두향이야 죽어서 단양의 '영원한 나루'로 남았지만, 저 옥순대교는 두고 두고 원망의 기념물이 되지 않을까 적이 걱정이 되기도 한다.
'매한불매향(梅寒不賣香·매화는 춥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퇴계가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화두가 문득 뇌리를 스친다.
출처 : 국제신문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본 포스트는 박창희 기자님의 허락하에 게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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