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로드의 교량이야기/나루와다리

일본 간몬대교와 모지항

썬로드 2007. 12. 17. 08:45
열도의 관문 가로지른 현해탄 '애환의 역사'

 

1. 일본 시모노세키시와 기타규슈시를 잇는 간몬대교(총 길이 1068m)의 위용. 주탑과 주탑 사이의 주경간이 712m, 수면에서 다리까지의 높이가 61m인 철제 현수교다.


K형, 일전에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갔다 왔습니다. 가볍게 갔다가 다소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네요. 그곳의 다리가, 아니 나루가 제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지 뭡니까. 나루와 다리로 보자면, 섬나라인 일본은 우리보다 더 많은 자산과 얘깃거리가 있지요. 시모노세키의 경우, 그게 우리와 무관하지도 않고요. 소재 확장 차원을 넘어 한 번쯤 능히 주목할 필요가 있었던 게지요.

먼 고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수많은 배들이 그곳에 들어갔고, 그곳의 많은 배들이 우리 쪽으로 왔지요. 동아시아 해상교통의 요지인 현해탄(玄海灘)의 가슴이 까맣게 탈만도 하더군요. 거기에 양이전쟁이 있었고, 우호와 교류를 앞세운 간섭과 침략이 있었지요. 그게 역사였음을 현해탄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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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본이 양이전쟁때 사용한 조슈포(長州砲). 간몬대교 아래 해변공원에 5기가 전시돼 있다.
● 간몬대교

K형은 보았던가요, 간몬대교(關門大橋)의 위용을. 간몬대교는 웅장하고 다이내믹했습니다. 다리를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구나! 문득 부산의 광안대교가 생각났는데 솔직히 다이내믹 면에선 광안대교를 압도하더군요. 일본 본토와 규슈섬을 잇는 막중한 역할 때문인지, 지리적 장엄미랄까, 그런 느낌도 안겨들었습니다.

철제 현수교인 간몬대교는 1973년에 완공됐고, 총 길이가 1068m입니다. 주탑과 주탑 사이의 주경간이 712m, 주탑의 높이가 133.8m더군요(광안대교의 주경간은 500m, 주탑 높이는 116.5m임). 수면과 다리(상판) 사이의 높이는 무려 61m(광안대교의 선박통과 높이는 35m)나 됐지요. 이 아득한 높이가 다이내믹함을 연출하고 있었지요.

이곳을 통과하는 각종 선박이 연간 25만5000척이나 된다는군요. 화물선이 가장 많고, 여객선 카페리 어선들이 그 다음을 잇고 있었지요.

철판을 잇대어 만든 격자구조는 무슨 설치예술 같았지요. 하늘빛과 바다빛을 받아 반짝이는 간몬대교를 보고 있자니, 살짝 질투가 나더군요. 이곳엔 다리만 있는게 아니라, 신칸센 철도와 국도 인도 등 각종 해저터널이 무려 7개나 된다는군요. 그런데 상부의 다리는 딱 하나. 존재감이 돋보일 만하죠.


● 겐페이소하

다리가 걸린 이곳이 그 유명한 간몬해협입니다. 야마구치현의 최서단에 위치하는 시모노세키시는 간몬해협을 끼고 기타규슈(北九州)시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이 해협은 국제항로이자 내해로 연결되는 통로로써 일본 해상교통의 요로라죠. 간몬해협의 길이는 27㎞, 폭은 500~1000m, 수심은 대략 12m 정도라고 하더군요. 조류가 세더군요. 최고 10노트(시속 18.5㎞)가 넘는다고 합니다.

이 간몬해협은 안토쿠(安德) 천황의 패전지라더군요. 패전지란 말이 귀에 짠하게 박히더군요. 12세기 일본 헤이안시대 후기의 얘기입니다. 1180년 안토쿠 천황은 3세의 나이로 천황이 되었는데, 신하로 있던 무사 다이라 기요모리(平淸盛)와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사이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져 전쟁으로 비화하죠. 일본사에 나오는 '겐페이소하(源平爭覇)'입니다. 이때 천황의 할머니 고시라가와(後白河) 황후는 다이라(平)와 정을 통하는 사이였는데, 권력다툼은 미나모토의 승리로 끝납니다. 최후의 전장이 바로 시모노세키 앞바다인 단노우라(壇の浦)에서 있었는데 패전이 확실해지자 황후는 안토쿠를 안고 간몬해협에 뛰어들죠. 안토쿠 천황이 8세이던 1185년의 일입니다. 이후 미나모토는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를 열게 되고, 일왕은 700여년간 명목만 유지하죠.

안토쿠 천황이 죽은 후 사람들은 진흙으로 상을 만들거나 화상을 그려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지요. 1604년 송운대사 유정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를 데려오기 위해 시모노세키를 방문해 그곳 아미다지(阿彌陀寺, 현 아카마신궁)에 모셔진 안토쿠 천황을 조문하는 글을 쓰지요. 17~18세기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조선통신사들도 그를 기리는 시문을 남겼고요.

하고보니 안토쿠가 예사 역사인물이 아닙니다. 시모노세키시는 매년 5월 '센테이사이(先帝祭)'라는 제사를 지내고, 시민축제인 바칸 마쯔리(馬關まつり)를 통해 그를 대대적으로 추모합니다. 안토쿠는 시노모세키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인물이더군요.


● 조슈포

간몬대교 아래 해변 공원에는 단노우라 옛 전장지(戰場址)가 표시돼 있고, 당시 전투를 묘사한 동판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역사 속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려 한 것 같았지요. 이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이 그 옆에 설치된 전시용 대포였습니다. 대포는 모두 5기로, 가장 큰 포신은 길이 3.56m, 구경 20㎝였습니다. 일명 조슈포(長州砲)라 불리는 대포인데, 역사적 사연이 있더군요. 막후 말기인 1864년 일본은 구미 열강과 양이(洋夷)전쟁을 벌입니다. 한국은 이즈음 척왜양이를 외쳤지요.

당시 일본은 간몬해협에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연합군과 맞서 싸웁니다. 도쿠가와 막부는 조슈포를 만들어 쏴 댔지만 역부족, 무참하게 무너집니다. 연합군인 프랑스는 전리품으로 조슈포를 자국으로 가져갑니다. 일본역사가 세계사에 개입하는 순간이지요. 이후 일본은 세계사의 조류에 휩쓸려 메이지유신으로 나아갑니다. 그때 뺏긴 조슈포를 가져와 복원, 전시한 것이 예의 대포였지요. 간몬해협을 굽어보는 조슈포에 군국주의의 그림자가 일렁거렸습니다.

에지마 기요시(江島潔·50) 시모노세키 시장은 이 대포를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개방을 요구한 연합군에게 도쿠가와 막부는 무너졌지만, 조슈번(시모노세키 정치세력)은 끝까지 싸웠다. 그 증표가 이 대포다. 당시의 기술차이를 인정하고 외국문화를 받아들여 변화한다는 표시로 이 대포를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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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기타규슈시 모지항의 블루윙 도개 모습. 일본에서 유일한 보행자 전용 개폐식 다리다.
● 모지항 레트로

K형, 모지항은 보았겠지요? 워낙 유명한 곳이라 인터넷에도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더군요. 시모노세키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 닿는 곳이라 어렵지않게 들를 수 있었습니다. 모지항은 고색창연한 관광 포구더군요. 이름하여 '모지항 레트로(門司港レトロ)'. 레트로(Retro)란 '옛날을 그리워하다' 또는 '회고적'이란 의미로, 이곳의 콘셉트를 설명해줍니다.

1889년 개항한 모지항은 기타규슈시의 공업화와 함께 국제무역항으로 번영을 구가합니다. 전성기땐 월 200여 척의 외항선이 들어왔고, 연간 600만여 명의 관광객이 찾았다더군요. 그러나 대동아전쟁을 겪으면서 쇠퇴, 퇴락한 항구가 되었죠. 그런 모지항을 복원, 정비해 운치있고 낭만적인 테마파크로 탄생시켰더군요. 모지코역을 비롯, 구 모지 미쓰이클럽, 구 오사카상선, 구 모지세관, 국제우호기념도서관 등 어느 것 하나 볼거리 아닌 것이 없었지요. 구 모지 미쓰이클럽은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묵었던 곳이라고 홍보하더군요.

블루윙 모지가 특히 인상적이었지요. 일본에서 유일한 보행자 전용 개폐식 다리인데, 들리는 모습이 장관이었습니다. 푸른 바다가 정말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것 같았지요. 다리는 하루에 6번 개폐되며 배가 통과하지 않아도 제 혼자 시간 맞춰 들렸지요. 문득 영도다리가 떠올랐습니다. 영도다리가 다시 들린다면 어떤 풍경이 될까요. 처음인데도 어쩐지 그리운 도시 모지코. 마음의 평온과 감동을 안고 그곳을 벗어나면서 생각했습니다. 아, 포구가, 나루가 저렇게 다시 태어날 수 있구나….


● 불의 산

시모노세키시의 전망대 히노야마(火之山) 공원에 올라 간몬해협을 굽어봅니다. 왜 불인가? 양이전쟁 때 포격을 당해 불바다가 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답니다. 일본인들은 당한 역사를 이처럼 되씹어서 기억합니다. 조슈포가 그렇고 불의 산이 그렇지요.

히노야마 공원에서 보는 간몬대교와 해협은 눈부신 풍경이었습니다. 멀리 기타규슈의 모지항이 보이고 더 멀리로 현해탄이 가물거렸지요. 해발 268m의 불의 산은 후끈거렸습니다. 날씨 탓만이 아니었지요. 한국과 일본의 인연과 악연, 침략의 역사, 새로운 교류….

시모노세키는 우리에게 아픈 기억을 남긴 곳입니다. 정한론(征韓論)의 씨앗이 뿌려졌고, 한반도 침략의 발판이 됐던 시모노세키 조약이 여기서 체결됐지요. 관부연락선이 일제 징용자들을 싣고 부린 곳도 이곳이지요. 해협의 아스라한 구름 속에 조선통신사 행렬이 보이고, 그 뒤를 19세기 일본의 정한론자들이 뒤따르는 환상은, 불의 산을 더욱 후끈거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역사는, 교류하고 믿음을 쌓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아, 현해탄은 어쩌자고 거센 조류를 간몬해협으로 몰아넣어 이토록 역사를 힘들게 하는지.

나루와 다리는 단순한 낭만과 회고 정서가 아니라, 어제를 되돌아보고 내일을 여는 전략이자 전술임을 시모노세키에서 새삼스레 배웠습니다. K형, 언제 한번 같이 시모노세키에 가시구료.


출처 : 국제신문 - 박창희 기자의 감성터치 나루와 다리
본 포스트는 박창희 기자님의 허락하에 게제합니다.